한나 아렌트의 통찰을 빌리면 전체주의가 총구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분위기에서 시작됩니다. 모두가 같은 방향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 그 압력에 저항하는 일이 용기가 아니라 이상함으로 읽히기 시작하는 순간, 전체주의는 이미 도착해 있습니다.

스타벅스 코리아의 전국 매장 동시 조기 종료와 전 직원 일괄 역사 교육을 보며 저는 그 도착을 생각했습니다.

이 사태를 마케팅 실수에 대한 기업의 책임 있는 대응으로 읽는 시선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독법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역사 인식과 사회적 감수성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건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무엇에 분노하고, 어디에 감수성을 둘 것인가. 이것은 개인이 살아온 시간과 경험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지, 반나절의 집체 교육으로 주입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나절로 그것이 심어진다고 믿는다면 교육에 대한 무지입니다. 심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행했다면,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의식입니다. 굴복의 의식입니다.

그 의식에 동원된 것은 이 논란과 아무 관련 없는 수만 명의 직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양심이 교정받아야 할 상태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자리에 앉혀졌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자리에 말입니다. 소비자들은 오후 세 시에 문이 닫힌 매장 앞에서 그 의식의 간접 증인이 되었습니다. 전체가 동원되고, 전체가 목격하는 구조. 이것이 전체주의적 퍼포먼스의 문법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경위가 충분히 밝혀지기도 전에 관련자들이 이미 중대한 인사 불이익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진실의 확인보다 처벌의 집행이 먼저였습니다. 이 순서의 전도는 우연이 아닙니다. 분노한 여론이 진실보다 빠르고, 그 분노를 등에 업은 권력이 절차보다 앞설 때, 법치는 형식만 남기고 내용을 잃습니다.

그리고 이 흐름의 선두에는 정부와 정치권이 있었습니다. 기업의 마케팅 결정에 대통령의 발언이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특별한 일로 여겨지지 않는 사회. 이것은 단순한 정치 과잉이 아닙니다. 공적 권력이 민간의 양심을 향해 손을 뻗는 일에 사회가 익숙해지는 과정입니다.

전체주의는 언제나 선명한 깃발을 들고 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올바른 역사 인식’이라는 말로, 때로는 ‘사회적 감수성’이라는 말로, 반박하기 어려운 언어를 앞세워 조용히 스며듭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틀린 역사 해석만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특정한 역사 해석을 강제할 수 있는 권력의 구조가 정상화되는 일입니다.

교육은 동의로 시작합니다. 강제된 자리에서, 강제된 방향으로, 모두가 같은 표정을 짓게 만드는 일을 우리는 교육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양심의 정렬입니다.
그리고 양심이 정렬되는 사회에서 자유는 가장 먼저 침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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