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의 원인은 밝혀질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 ‘우연히’ 생긴다. 내 주변만 봐도 담배 한 대 피운 경험이 없는 친구가 폐암에 걸리기도 했고,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았던 친구 아버지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병이 찾아오는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죽음은 필연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을 가진 것들은 태어난 순간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오래 유방암을 앓던 철학자 미야노 마키코와 의료인류학자인 미소노 마호가 서로 주고받은 편지 글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은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고찰로 가득하다. 특히 암환자였던 미야노 마키코가 질병을 어떻게 삶에서 받아들이고, 의사의 말을 착하게 들으면서 혼자 치료를 선택하고 감당해야 하며 삶의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은 사유로 이어진다.
2019년 4월부터 시작된 편지는 그해 7월 6일로 끝난다. 그리고 7월 6일 미야노 마키코는 떠났다.
철학자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가 생각났다. 임종 사흘 전까지 아름답게 써내려간 선생의 선생의 글들.
자신이 아닌, 살아있을 사람들을 위해서 쓴 선생의 글들.
이 책은 두 학자가 서로 주고받으며, 다른 폭과 넓이로 펼쳐진다.
무엇보다 철학자로서 자신의 질병을 포함한 삶의 우연에 대한 질문과 사유는 죽음으로 가는 필연과 함께 깊은 통찰을 하게 한다.

 

미야노 마키코는 자신이 우연에 끊임없이 질문했던 이유, 그리고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왜 그렇게까지 ‘우연’에 의문을 품고 설명하려 했을까요?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우연에야말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살아가려 하는 힘’의 시초가 있기 때문입니다.(중략)
우연한 병은 자신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또다른 자신이 되었을 가능성을)를 끄집어냅니다. 저는 그 공포 앞에서 ‘지금과 달랐을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방이 떨어져 나간 몸을 필사적으로 마주 보며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간신히 저를 유지하고 존재하게 하여 일상을 되찾았지요.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자 우연한 현실을 살아가는 저의 ‘생산 원리’입니다.
지금, 저는 모르핀을 대량 복용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모르핀 탓에 저항할 수 없는 졸음에 휩싸이고 신체감각이 불확실해졌습니다. 항상 세계와 저 사이가 피막 한 장으로 막힌 듯합니다. 얇은 막이 제 몸을 뒤덮고 있는 것 같지요. 그런 와중에도 고통은 신기하게 맡은 역할을 착실히 합니다. 고통은 제 몸을 일종의 ‘대상’으로 만들어 한 점에 집중시킵니다. 하지만 고통 덕에 저는 제 몸을 떠올리고 스스로를 강하게 실감합니다.
물론 고통으로 느끼는 나의 존재는 ‘우연한 병 때문에 마주한 죽음의 공포’라는 연못가에 있습니다. 병 따위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에 걸린 나의 존재가 고통과 죽음의 공포 속에 서 있습니다.
무섭습니다. ‘지금과 다를 수 있었다’는 가능성 따위가 아니라 무 속으로 제가 빨려들 것
같습니다. 그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저는 생각하고 글을 씁니다. 그럼으로써 간신히 삶의 세계에 발을 딛고 있습니다. 고통과 죽음 속에서 나를 되찾고, 계속 나로서 있기 위해 글을 씁니다. 이를 철학하는 이의 다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지금도 저는 글을 씁니다. 글에서 꿈틀대는 생에 대한 집착, 그것이야말로 살아가려 하는 힘의 시초이며 우연성을 살아내는 행위라는 걸 병을 앓으며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 고통은, 이 글을 쓰려 하는 충동은, 저만의 것이니 우리 팀의 에이스는 틀림없이 저입니다. 다른 사람은 결코 던질 수 없을 것입니다. 197-201

살아가는 일은 불확실하다. 그럼에도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고, 무슨 일인가를 순간순간 결정하면서 삶을 잇는다. 그러나 언젠가 죽음은 필연으로 올 것이다. 그 필연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며 사라질 수 있을까.
미야노 마키코도 책에서는 그야말로 ‘폼 잡고’ 이야기하지만, 그도 말한다. ‘불운에 분노하고 학문의 언어로 불행과 맞서려 하는 철학자 미야노의 이면에는 훌쩍거리면서 불만을 늘어놓는 울보 미야노가 있’다고(150p)
왜 그렇지 않겠는가. 사람인데.
끝나는 순간, 점으로밖에 남을 수 없는 인간.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다른 점을 만나 선을 이으면서 아름다운 뭔가를 만들어내야 하지 않을까.
오늘 살아 있고, 오늘 다가올 우연을 즐겁게 맞이하면서.

책 속 구절들.

별 계획 없이 돌아온 교토에서 저는 우연히 어느 병원을 알게 되었고, 앞으로 그곳에서 돌봄의 방향을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선택지를 비교해서 합리적으로 결정한 게 아닙니다. ‘우연한 만남’에서 자연스럽게 ‘여기로 하자’라는 마음이 들어 이뤄진 결과지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방향을 계획하게 ‘되었다’고 적은 것입니다. 제가 선택하고 결정한 능동적인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와 간호사의 왠지 친숙한 분위기에 절로 마음이 끌려서 별다른 고민 없이 “그럼 잘 부탁드려요”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 경험을 돌이켜보면 애초에 ‘선택’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합리적으로 비교하고 검토할 수는 있겠지만, 과연 우리는 정말로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선택하는 것이 정말로 ‘선택’한다는 것일까요? 결국 무언가에 떠밀리는 식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다면, 선택을 능동적인 행위라 할 수 있을까요? 그저 어떤 상태에 이르러 안정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것은 합리적인 지성의 작용이라기보다 쾌적함이나 반가움 같은 신체감각과 비슷할지 모릅니다. 신체감각이기 때문에 스스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수동적인 면이 있을 수도 있고요.
적어도 죽음을 앞에 두고 ‘약한 운명론’에 휘말려 꼬일 대로 꼬인 제 가능성을 풀어준 것은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저에게 익숙한 교토와 그곳에서 마주한 우연한 만남이 저의 현재와 미래에 빛을 비춰주었다. 55-56

세계를 믿고 ‘지금’에 몸을 내맡기며 우연 속을 살아가는 삶이란 무척 멋집니다. 저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렇게 살고 싶다고 바랍니다. 하지만 우연에 몸을 던지는 삶은 주위 사람까지 끌어들입니다. ‘나 혼자 선택하면 그만’이 아닙니다. 우연에 몸을 던져 연애를 하는 것과 제 병에 주위 사람들이 휘말리는 것은 꽤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우연의 철학을 연구해온 저의 현재 가장 큰 고민입니다. 106

세상에는 불운에 지쳐 쓰러져서 누군가 제시한 원인을 마주하고 부조리를 수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100퍼센트 환자가 되는 사람들이겠지요. (중략) 그럴 때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놓아버리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 불행이 생겨나는지도 모릅니다. 무척 얄궂은 이야기인데, 불운이라는 부조리를 받아들여 자신의 인생을 고정한 순간 불행이라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129​

미야노 씨의 편지를 읽고 불행과 불운은 어떻게 다를까 저 나름 생각해보았습니다. 불운은 점, 불행은 선이라고 생각하면 차이가 뚜렷해질 것 같습니다. 휴식 중에 창고가 무너진 것은 불운이지만, 그 일을 자신의 인생에서 어느 자리에 둘지에 따라 의미는 크게 변합니다. 불행으로도, 웃긴 일화로도, 대수롭지 않은 일로도 둘 수 있지요. 그러니 불운이란 한 줄로 늘어선 여러 가능성 중 실제로 한 가지(점)가 일어난 것입니다. 139

저는 미야노 씨를 통해 아픈 사람과 나누는 대화에도 무서움을 막아주는 여러 규칙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중략) 예컨대 ‘나는 내년까지 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미야노 씨에게 “빨리 낫길 바라요”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그보다 심하게 비아냥거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몸조리를 잘하려고’ 하거나 ‘무리하지 않고 쉬려고’ 하면 미야노 씨는 어디에도 가지 못할 것입니다. 고통에 시달리고 숨쉬기도 어려워 모르핀을 복용하는 사람에게 “괜찮아?”라고 물어본들 아무 의미도 없을 테고요.(중략)
이 말들을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중략)
대화의 암묵적인 규칙에 입으로 하는 말만 포함되는 것은 아닙니다. 몸이 아픈 듯하면 다가와 말을 걸거나 뭔가 해줄 수 없는지 찾는 등 행동도 대화에 포함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106-168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있는 죽음에 대한 분석이 밝혀냈듯이,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종말은 ‘반드시 완성된다는 뜻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확실히 지금 저에게 죽음은 가까이 다가왔고, 당장 내일 닥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준비해야겠지요. 하지만 인간은 죽음을 제어할 수 없고 언제 죽음이 닥칠지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준비한들 충분할 수는 없습니다.
저의 인생은 무언가 하는 도중에 중단될 수밖에 없습니다. 180

지금 미야노 씨는 모르핀조차 소용없을 때가 있어서 신경계에 작용하는 약을 추가해 통증을 조절하고 있습니다. 병세가 한층 더 악화되었지요. 그런 상황에서도 미야노 씨가 보내는 답장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미래를 바라보며 타인과 함께 무언가 생성해내려는 운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인간이란 이렇게나 아름다운 선을 그려낼 수 있구나.(중략)
우리는 언젠가 어디에선가 반드시 마지막을 맞아 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순간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기에 저는 바람직하게 연결될 뿐인 점으로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에게 여력이 있는 한 세계를 지각하고 그 세계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계속 선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러다 만나는 다른 선과 새로운 선을 엮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217-218

우연을 받아들일 때야말로 ‘나’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성립된다. 259


[출처] 미야노 마키코, 이소노 마호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작성자 생각을담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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