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직도 분이 안 풀려서, 말이라도 해야 분이 풀릴 것 같아서, 내가 이렇게라도 말을 하네.
일흔쯤 된 그가 울먹이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말을 멈췄다, 씩씩거리며 빠르게, 때로는 천천히 말했다.
그는 이웃에게 한바탕 당하면서 대거리 한번 못하고 나왔다고 했다.
앞뒤 두서가 없어 나로서는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맘속에 가득한 분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어 그의 발목을 쓰다듬었다.
손을 잡고 싶었으나 가을걷이로 콩을 까느라 그는 목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는 마당에 비닐을 깔고 한쪽 다리를 펴고 앉아 있던 참이었고,
쪼그리고 앉은 내 앞으로 그의 허연 발목이 삐져나와 있었다.
그보다 더 늙은 남편은 뒤에서 아무 말없이 콩깍지를 벗기고 있었다.
이 양반한테 말을 할 수가 있나, 아시다시피 우리 아들에게 말할 수도 없고. 내가 어디다 말을 할 수가 없어, 그러니 분이 더 안 풀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밖에 나온다니까. 한 달도 넘었는데.
그는 남편과 자식을 앞세울 형편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구보다 억세게 살아야 했던 그다.
그는 틈틈이 콩깍지를 벗기고, 부스러기를 옆에다 치웠다.
부스러기 속에서 작은 검정콩이 보였다.
약콩 같았다.
나는 그가 말할 때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세상에, 얼마나 속상하셨어요. 아이고, 화병이 생기시겠어요. 어떻게 그렇게 일을 당하시고.
다리가 저렸다. 내가 일어날 기미가 보이자 그가 돌려앉아 콩을 깠다.
이렇게라도 말을 해야 살지.
언제 울었느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였다.
나는 갖고 간 도라지 바구니를 그 곁에 쏟아놓았다.
텃밭에 3년 키운 도라지를 캤고, 그것을 나누는 참이었다.
햇빛 속에서 그가 말했다.
콩 다 까고 도라지 까야겠네.
돌아와 나도 도라지를 깠다.
도라지는 까도 까도 깐 도라지보다 까지 않은 도라지가 훨씬 더 많이 쌓여 있었다.
돌아가신 부모 생각이 많이 났다.
아니 에르노의 소설 <남자의 자리>도 생각났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다.
그대로 놓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예전 같으면 불을 켜고 더 일을 했을 것이다.
처음엔 그럴 생각이었다.
그러나 허리가 많이 아팠다.
내일 하면 그만. 못해도 그만.
나누고도 또 남으면 버려야지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언젠가 이 땅을 떠날 때도 이렇게 떠나야지, 생각했다.

안갯속에서 새가 날아올랐다.​

​[출처] 도라지를 까다|작성자 생각을담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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