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는 벌써 세 번째 심을 샤프 뒤꽁무니에 밀어 넣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조각조각 부서진 심이 흩어져 있었다. 의족이 바닥에 부딪히면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자 수경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다리 좀 그만 떨면 안 돼?”
“미안.” 유리는 다리를 아예 꼬아 버렸다. 애써 집중하며 손을 놀리기를 얼마, 또다시 샤프심이 부러졌다. 유리는 결국 포기하고 펜을 꺼내들었다. 은하와 같이 산,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장난스럽게 비슷한 색깔로 맞춘 모델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눈길이 옆으로 향했다.
추석 연휴까지 합쳐 1주일이 지났고, 은하는 도합 10일 정도 수업에 오지 않고 있었다. 도서관에도 슬쩍 나타났지만, 그러기 무섭게 어디론가 도망쳤더랬다. 식사는 잘 하고 있는 건지, 무슨 사고라도 난 것은 아닌지 걱정이 한가득 이었지만 분노에 찬 그 비명이 귓가에 어른거려 도무지 은하의 방으로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유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했다. 미안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렇게 억지로 문을 여는 것이 아니었다. 조금 더 시간을 두었어야 했다.
“하루 종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점심시간, 일부 학생에게는 학교에 오는 이유이기도 한 그때 수경이가 물었다.
“은하가 걱정돼서.” 유리는 자신의 공책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처럼 이 색깔 저 색깔 써 가며 필기할 여력도 없었다. 수경이는 방금 전에 유리가 그랬던 것처럼 한숨을 푹 쉬었다.
“너나 신경 쓰는 게 어때? 계속 기운 빠져 있잖아. 오히려 네가 사고 칠까 봐 걱정된다.”
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의족을 내려다보았다. 은하를 만난 이후 의족에 더 신경을 많이 쓰게 되었다. 정확히는 그 주변의 수술 자국을 이전보다 많이 보게 되었다.

재활 치료 중 문제가 생겨 특수학교로 오기 전 유리는 말 그대로 특별 취급이었다. 신기해서였든 불쌍해서였든 수없이 많은 값싼 동정을 받았다. 지금이라면 예의상 받아주면서 속으로는 질색을 했겠지만 그 때의 유리는 그것을 싫어하지만은 않았다. 아니, 어느 정도는 즐기고 있었다. 의도에 상관없이 누군가가 봐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했었다. 하지만 은하에게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남들로부터 자신을 감추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밥을 먹으러 급식실로 내려왔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움이 가시지 않았다. 유리는 혹시나 싶어 급식실 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1주일이나 음식 없이 살 수는 없으니 밥이라도 먹으러 내려오지는 않을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은하는 나타나지 않았다. 방과 후에 도서관에도 들러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카페에도 역시 은하는 없었다.
“언니, 혹시 김은하라는 애 왔었어요?” 카페 언니는 카운터를 닦던 행주를 든 채 고개를 갸웃했다.
“김은하? 아, 혹시 그…머리 긴 애? 책 좋아하고.”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며칠 전부터는 못 봤는데…오전에 근무하는 애는 알려나?” 언니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조금 대화가 오고 간 뒤 언니는 유리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흉터 있는 애 맞니? 그…커피 시켜 놓고 1,2시간 앉아 있다가 가던 애.”
“네, 맞아요…아마도.” 유리는 ‘아마도’라는 말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걔 친구야? 많이 힘들어 보이던데.”
“그건…아마 제 잘못일 거예요.” 유리는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든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동안 전화 너머의 남성은 침묵을 지켰다. 유리가 이야기를 마치고 나자 남성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누가 잘못했다 할 만 한 게 아닌 것 같은데. 네가 은하한테 상처를 준 건 맞아. 근데 너희들이 상담 선생님도 아니고, 상처를 안 줄 수는 없었을 거야. 은하 같은 상태라면 특히. 장유리라고 했나? 네 얘기도 했어.”
“했었어요?”
“어, 너나 다른 사람들이나 자신을 환자처럼 보는 게 싫다고만 했지, 네가 싫다고 하지는 않았어. 다음에라도 만나게 되면 꼭 사과하고, 다시 똑같은 짓을 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남자는 이후에도 무슨 말을 더 했지만 유리에게는 더 들리지 않았다. 전화가 끊기고, 유리는 휴대폰을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죄책감도 그와 함께 조금은 내려놓은 것 같았다.

Photo by Sharon McCutcheon on Unsplash

은하는 그어 놓은 줄이 몇 개인지 세는 것조차 질린 달력을 보다가 침대에 누웠다. 커피와 샌드위치, 그리고 물.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는 느낌이었지만 아무런 위기감도 들지 않았다. 죽어 버려도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삶에서 해방될 수 있으니 좋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그러려 할 때마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가면 갈수록 제대로 죽지도 못 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이렇게 매일 매일을 견디느니 차라리 미쳐 버리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숨이 거칠어지고 가슴을 거대한 돌덩이가 짓누르는 것 같은 기분을 더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은하는 아침 일찍 빌려 다 읽은 책들을 책상 위에 쌓아 놓고 침대에 누웠다. 드럼 소리와 보컬의 고음이 이어폰을 통해 귀를 찔러 왔다. 은하는 눈을 감았다. 길고 긴 기타 리프가 시작되기 무섭게 노크 소리가 울렸다. 은하는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보았다. 누군지 모른다. 금방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노크는 멈추지 않고 계속 울렸다. 시끄러웠다. 하지만 소리를 지를 기운도 없었다. 결국 은하는 한숨을 내쉬며 문가로 갔다. 문을 살짝 열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왜 왔어?” 은하가 말했다.
유리는 은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충동적으로 찾아온 것이 뒤늦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괜히 애꿎은 바닥에만 시선이 쏠렸다. 은하는 유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문을 닫으려 했다.
“지난번에 그건 미안했어.” 유리가 말했다. 은하의 손이 멈췄다.
“…신경 쓰지 마.” 은하가 말했다. 복도가 조용하지 않았더라면 듣기 힘들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나도 별로 신경 안 쓰니까…지금 사과도 그냥 네 죄책감을 덜려는 것뿐이잖아. 내 심정은 생각도 안 하면서.” 은하는 문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유리에게 화를 냈다는 사실이 미안하기는 했지만 입은 저절로 다른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알아. 그래도 미안해, 억지로 들어가서. 나라도 화났을 텐데….”
은하는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 수척해진 얼굴 탓에 흉터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됐어. 사과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잖아. 솔직히 말할게. 너희들이 날 도움이 필요한 사람처럼 보는 게 싫었어. 날 무력한 사람으로 보는 애들은 많았으니까…여긴 나랑 비슷한 사람들 많잖아. 여기서도 또 같은 취급 받긴 싫었어. 그래서 화가 났을지도 몰라.”
유리는 잠자코 은하의 말을 듣고 있었다.
“웃기지 않아? 너희들이 배신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또 너희들을 찾고 있었어. 그런데 밖으로 나갈 생각은 못 하고…. 지난번에 했던 말, 본심이 아냐. 이해 못 한 건 나야. 너희들이 아니라.”
“은하야, 우린….”
은하는 문을 닫아 버렸다. 문 너머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혼자 있고 싶어. 내일 다시 얘기하자.”
유리는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차라리 지금은 쉬게 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내일 다시 얘기해 보면 될 것이다.

은하는 유리가 가고 난 뒤 침대에 몸을 뉘였다. 무심코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지만 본심은 결코 바깥에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 가서 사람들도 만나고 그래야지.’ 언제 이모가 그 말을 했었지? 상주고등학교에 전학 오게 된 건? 유리를 처음 만난 건 언제였지? 언제부터 ‘친구’라는 개념이 익숙해졌지? 어째서 유리가 사과하러 온 거지?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 그게 아니라면, 유리는 뭘 원하고 있는 거지?
답답했다. 유리가 옆에 있었다면 속 시원하게 물어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수경이는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냐며 웃을 것이고, 현은 ‘글쎄’로 운을 떼면서 대답하겠지. 하지만 무서웠다. 학교에 다시 갔는데, 예전처럼 대해 주지 않고 피한다면? 유리를 빼고 생각한다고 해도, 다른 둘은 아직 화가 나 있지 않을까? 은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녁놀이 지고 있었다.
많이 변했구나. 어른들이나 할 법한 생각이었지만, 은하는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내일, 뭐라도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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