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는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음악을 듣던 중에 은하에게 보였던 여유롭고 약간의 무아지경이 덧붙여진 표정은 없었다. 흉이 진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조금은 답답해하는,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동시에 잊으려고 애쓰는 표정이 섞여 있었다. 달력에는 일곱 개의 줄이 그어져 있었다.
급기야 이어폰이 벽에 부딪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대체 왜 유리는 자신에게 다가온 것일까. 동정? 연락할 가족 하나 없는, 화상을 입은 모습이 불쌍해 보였을까? 아니면, 자신을 놀리고 싶었을까? 최수경이라고 했던가, 그 녀석이 저녁에는 없으니 대용품으로 자신을 선택한 것인가?
물론 선생님의 부탁이 있었다고 해도 유리가 그날 은하와 마주친 것은 우연이었고, 저녁을 같이 먹은 것은 순수한 호의였다.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유리의 마음이었지만 은하는 그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 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알았다면 은하는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답을 할 수 없는 질문, 확답을 들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질문. 은하는 베개를 양 팔로 감싸 안았다. 마치 그것이 살아 있는 생명체인 것처럼.
혼란스러운 감정과는 별개로, 은하는 그날 밤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결국 3시간 정도밖에 잠을 자지 못 한 은하는 알람 소리가 들리지 않자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토요일이었다. 여태껏 주말이라는 것도 알지 못하고 내일 어떻게 해야 할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니, 한숨을 내뱉은 은하는 밤새 입고 있던 교복을 벗었다.
속옷을 갈아입던 중 다리와 허리의 흉터가 시선에 닿자 은하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젠 아프지도 않은데. 은하는 세탁해야 할 옷들을 종이 가방에 넣고 와이셔츠와 바지를 입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기숙사 세탁소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세탁물을 세탁기에 밀어 넣고 그 앞에 앉아 기다리던 중 몇몇 아이들이 문 앞을 지나갔다. 남자가 둘, 여자가 셋이었다. 여자 기숙사지만 어쨌든 남학생들도 어슬렁거리는, 대부분의 기숙사가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은 이 학교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었다.
책을 가져왔어야 했는데. 병원에서 이미 수없이 겪어 왔는데도 지루함은 견디기 힘들었다. 다음에는 짧은 것이라도 책을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은하는 끝없이 돌아가는 세탁기를 바라보았다. 소용돌이 같은 모습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일찍 일어났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고개를 들자 유리가 옆에 앉아 있었다. 아마 유리의 세탁물인 것 같은 것들이 세탁기 안에서 돌고 있었다. 검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어두운 색조가 대부분인 은하의 것과 달리 밝은 색감의 옷이 간간히 보였다.
“…응.” 은하는 짧게 대답하고 다시 자신의 세탁물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제는….”
“아무 것도 아냐. 그냥 좀…속이 안 좋았어.” 딱 잘라 대답했다. 연기와 사이렌 소리가 들리자마자 은하는 입맛이 싹 가신 것은 물론이거니와 식은땀마저 나기 시작했다. 유리가 은하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무언가 말을 더 하려던 유리는 입을 다물었지만 은하에게서 시선을 떼지는 않았다. 몇 분간 둘 사이를 떠돌던 불편한 침묵을 깬 건 은하였다.
“여기 오고 나서….”
“응?” 유리는 고개를 휙 들었다. 잠깐 졸았나 싶었다.
“동아리 얘기를 들었어. 그거…꼭 해야 하는 거야?”
“글쎄, 의무는 아니지만 작년에 활동이 너무 적어서 말이 많던데. 왜,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은하는 바닥을 향하던 시선을 세탁기로 돌렸다.
“아니, 그냥 궁금했어. 굳이 하게 된다면…도서부겠지, 아마도.”
“역시 도서부구나. 여기 도서관, 상태 좋지?”
“중학교보다는…좋은 거 같아. 너도 혹시….”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난 체조부야, 근데 별로 멀지 않아서, 심심하면 가거든.”
은하는 대화를 이어나가지 않았다. 도서관, 그 방대한 정보의 공간을 심심하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은하에게 있어 도서관은 하나의 광장이나 마찬가지였다. 널찍하면서 동시에 폐쇄되어 있어, 각각의 개인은 전혀 방해받지 않는 광장.
“저기, 그럼 연습 끝나고 도서관 앞에서 기다려도 돼? 괜찮으면 어제처럼 식사 같이 하자.”
은하는 유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유리는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하도 따라서 천장에 뭐가 있나 쳐다보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평범한 천장이었다.
“…마음대로 해.” 누구랑 먹든, 그다지 관심 없었다.
영원히 돌고 있을 것만 같던 세탁기가 멈추었다. 동시에 영원히 앉아 있을 것만 같던 은하가 일어나 세탁기 뚜껑을 열었다. 세탁물을 챙기는 동안 유리는 자신의 세탁기를 쳐다보았다.
은하는 방으로 향했다. 문을 잠그고, 침대에 앉아 책장을 펼쳤다. 토요일은 그렇게 흘렀다.

일요일, 유난히 더웠던 그 해 여름의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는 것을 강력하게 어필하듯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그날 은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3권이나 되는 두꺼운 책들은 그날 오전이 가기 전에 다 읽어 버렸고, 결국 점심때가 되자 은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바지를 입었다. 도서관에 가려는 것이었다.
도서관으로 가던 중 체육실을 지나게 되었다.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일요일 연습을 마친 아이들이 보였다. 하얀 사선이 멋들어지게 그려진 검은색 체조복 차림의 아이들 사이로 유리가 보였다. 은하는 잠시 미소를 지으며 대화에 열중하고 있는 유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유리가 시선을 끄는 이유는 그냥 아는 사이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흉터를 보고도 스스럼없이 다가와 준 탓도 아니고, 또래보다 한두 살 연상으로 보일 만큼 성숙한 외모 탓은 더더욱 아니었다. 은하는 그렇게 되뇌며 도서관 문을 열었다. 책을 반납하는 동안 사서는 은하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은하는 눈치체지 못 했지만, 그 눈빛에는 어떻게 이렇게 빨리 책을 전부 읽었냐는 질문 아닌 질문이 담겨 있었다.
은하는 잠시 대출대 위에 놓인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도서부 모집 공고. 안내받은 대로 동아리 모집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잠시 그 종이를 읽던 은하는 한 장을 가방 속에 넣었다.
“아, 은하야!” 도서관에서 나오던 은하를 본 유리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은하는 그 모습을 보더니 유리에게 다가갔다.
“잘 있었어?”
“그냥…별다를 건 없어. 도서부 신청할까 해서 들른 거야.” 거짓말이었다. 신청할 생각 따윈 없었지만 혹시나 싶어 챙긴 종이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 저기, 한가하면 같이 산책이라도….”
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방에 가 있을게. 오늘은 피곤해서.”
유리는 머리카락으로 흉터를 급히 가리며 멀어지는 은하를 바라보았다.
복잡하다.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무엇으로 교집합을 만드는 게 좋을지 떠오르는 것은 거의 없었다. 은하는 연예인에 관심조차 갖지 않았고 교실에서는 남들이 옆에서 뭐라 하던 묵묵히 책장을 넘기는 아이였다. 유리는 잠시 머리를 굴리더니 결국 기숙사로 향하기로 했다. 지금은 피곤하니, 한가한 저녁에 생각하는 게 나았다.
한편, 은하는 침대에 누워서 종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도서부 신청 용지에는 아무 것도 적지 않았다. 과연 이것이 옳을까? 다른 사람과 다시 교류를 시작하는 일이 잘 하는 일일까? 은하는 멀거니 텅 빈 종이만을 바라보다가 이름을 적었다. 한 번쯤이라면 해 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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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월요일이 되자 은하는 아침 일찍 도서부 신청서를 제출하고 교실에 들어왔다. 남들에게 그런 자신을 보이는 것은 불편하기만 할 뿐더러 다시 잠들 기분이 나지 않기 때문에 일찍 등교를 한 것이다. 은하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책을 꺼냈다.
“어? 일찍 왔네?” 은하는 갑작스런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미역을 뒤집어쓴 것처럼 윤기 나는 검은 곱슬머리, 최수경이었다. 뒤이어 들어온 유리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은하는 짧게 대답하고 다시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잘 잤어?” 유리가 옆자리에 앉자 은하는 고개를 들었다.
“그냥…그럭저럭.” 거짓말이었다. 월요일의 압박을 감안해도 은하는 잠을 거의 자지 못 했다. 악몽 탓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음성. 열기와 선명한 주홍색 빛.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자신을 감싸던 손, 검은 주둥이와 렌즈로 가려진 얼굴.
어젯밤, 은하는 한밤중에 땀에 젖은 채로 깨어났다. 왕복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숨이 막혀 오고 날카로운 기억의 파편이 머릿속을 찌르자 은하는 비명을 질렀다. 잔뜩 쉬어 버린 목 탓에 갈라진 고음이 새어나왔지만 전혀 크지 않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들고 변기에 얼굴을 들이밀었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렇게 속이 끓어오르는데. 하지만 은하의 내장은 뇌를 거역하며 아무 것도 뱉어내지 않았고, 은하는 한숨을 쉬며 침대로 돌아갔다. 아직 불이 켜져 있어 방은 창백한 흰색이었다. 은하는 침대에 드러누워 숨을 몰아쉬었다. 몇 십 분 뒤 아침이 밝았지만 은하는 땀에 젖은 옷이 차갑게 몸을 조이기 시작하고 난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은하야? 여보세요?” 수경이가 눈앞에서 손을 흔들자 은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수업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교실에 들어와 있었다.
“괜찮은 거야?” 유리가 물었다. 바로 옆 자리라서 은하가 책을 한 장도 넘기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응. 왜?” 은하의 대답은 둘을 납득시키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했지만 수경이가 아무 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돌려 버리자 유리도 마지못해 고개를 저었다.
“그냥, 피곤해 보여서.”
“괜찮아….” 은하가 다시 대답했다. 그 사이 수업이 시작되었다.
교과서에 눈을 고정하고, 질문이 들어오면 아는 범위 내에서 대답하고, 밥 먹고, 이하 반복. 느리지만 꾸준히 지나가는 하루를 견디기 힘들었다. 국어 시간에 3인 1조로 프린트를 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제서야 은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과제를 수행하는 것은 자신 있었으니, 이번 시간만큼은 아무도 자신을 괴롭히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다고 둘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유리는 어느새 수경이를 대동하고 3개의 책상을 붙여 놓은 뒤였다. 은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 아이들이 총 21명이니 자신까지 조에 끼지 않으면 남는 아이들이 생겼다.
“시작할까?” 유리가 손에 쥔 샤프를 빙글빙글 돌렸다.
은하는 프린트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차피 자신은 빼 놓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혼자 문제를 풀려는 것이었다.

한동안 혼자 종이 위를 달리던 은하의 손이 멈췄다. 지문으로 제시된 대본은 두 명이 고슴도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이었다.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 몇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고 한다. 그 중 두 고슴도치가 서로의 온기를 나누려는 목적으로 다가섰지만 서로의 가시에 찔려 멀어졌다고 한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둘은 결국 서로에게 꼭 맞는 거리를 찾아냈다는 말,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그것과 똑같지 않겠냐는 말로 지문이 끝났지만, 사실 고슴도치가 보면 코웃음을 칠 것이다. 고슴도치는 가시를 눕힐 수 있으니.
문제는 쉬운 것이었지만 은하는 지문의 내용을 곱씹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리와 수경이가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은하는 문득 눈길을 떨궜다. 예전처럼, 사고 이전으로 돌아간다면 저 둘 사이에 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자신의 모습을 저 둘이 받아줄까? 유리가 친하게 구는 것 역시 허투루 다른 사람의 ‘가시’에 찔리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수경이는 머리를 감싸더니 은하의 프린트를 흘낏 보았다.
“이거 어떻게 푼 거야? 아무리 봐도 모르겠어….”
은하는 수경이가 고심하던 문제를 보았다. 간단하지만은 않은 문제였다. 은하가 자신의 푼 것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시작하자 수경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유리도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미소를 지었다. 둘 다 같은 문제에서 막혔던 것이다.

“은하야,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프린트의 끝이 보일 무렵, 유리가 갑작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불편한 거라도 있어? 표정이 어두워 보여서.”
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별로, 그보다 둘…사이 좋아 보이네.”
“당연하지, 우리가 얼마나 오래 알고 지냈는데!” 수경이가 피식 웃었다.
“작년에 같이 입학했어.” 유리의 말에 수경이는 입을 빼죽 내밀었다.
“뭐야, 1년은 오래 알고 지낸 게 아냐?”
“남들한테 자랑할 정도로 긴 기간은 아닌걸.”
수경이는 “네, 네.”를 연발하며 펜대를 머리카락에 대고 꼬았다. 그 모습을 보던 은하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곧 그것이 둘에게 보일 것이라 생각하자 은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은하는 종례가 끝나기 무섭게 도서관으로 향했다. 겨우 조별 과제 하나 했다고 마음이 복잡해진다는 게 믿기 어려웠다.
뒤따라 나온 유리 역시 도서관 쪽으로 향했다. 계단참에서 둘의 눈이 마주치자 은하의 시선이 흔들렸다.
“있다 봐…도서관 앞에서.” 은하는 그렇게만 말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그것을 지켜보던 유리의 입 꼬리가 휘었다.
조금은 담임선생님의 의도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물론 자신의 바람대로도.

도서부는 항상 인원이 부족하다고 말하기에는 그럭저럭 있지만, 그렇다고 많다고 할 수준은 아니었다. 서류를 넣은 학생들 대부분이 뽑혔는데도 간신히 인원을 채울 수 있었고, 합격자 중에는 은하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
“올해 대략적인 도서부 계획은 나눠 드린 서류를 참조해 주시고, 곧 있으면 축제죠? 이번에는 별다른 행사가 없으니 축제 기간에는 편하게 책을 읽는 공간으로 할 생각인데, 혹시 의견 있으신가요?”
넉넉히 잡아 봤자 10명. 그들 앞에서 안경을 쓴 아이가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얼핏 보면 아무 의미 없는 것 같았지만 약간은 서투른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손끝은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그 앞에서 수화를 통역해 주던 아이는 곧 제각기 의견을 내기 시작한 아이들의 말을 반대로 통역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은하는 가장 뒷자리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이 학교에서는 자신에 대한 첫인상이 초기화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상당히 먼 지역이라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날 일도 없고, 그런 만큼 악연을 유지할 일도 없었다. 다행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완전히 고립된 느낌이었다.
이대로 혼자 지내는 것이 편하기는 편하다. 하지만, 이번 한 번만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
“그럼 이것으로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겠습니다. 모두 수고 많았어요.” 멍하니 생각하던 사이 첫 동아리 시간이 끝나 버렸다. 은하는 의자를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상대로 유리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뭐 할까?” 유리는 방금 전까지 연습을 하고 있었던 듯 약간 땀에 젖은 모습이었다. 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별로 상관없는데….”
“그럼 카페 어때? 거기 샌드위치 말고 다른 거도 맛있는데.” 유리가 물었다.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이라도 친하게 지낼 사람이 있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거절하기 힘들었다. 물론, 카페에 가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혼자 가지 않는 것이 낯설 뿐이었다.
둘은 그렇게 기숙사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유리는 조금 비틀거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유리는 확실히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었다. 기숙사와 학교의 거리가 그렇게 가까운 것도 아닌데다가 카페는 기숙사 2층에 있었기 때문에 계단을 올라야 했다. 유리의 걸음걸이가 명백히 정상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알아챘기에 은하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이 어떻겠냐고 넌지시 물었지만, 유리는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뭐.”
정말 아파 보였지만, 은하는 그 말을 삼키며 마지못해 계단을 올랐다. 의족을 찬 발을 내딛을 때마다 유리의 표정이 알아채지 못 할 정도로 약하게 일그러졌다.
“정말 괜찮아?”
유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그것보다 뭐 마실래?”
“커피…로 할게. 우유랑 설탕 빼고….” 은하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태양이 지는 것이 잘 보이는 창가 자리였다.
유리는 레몬에이드를 주문한 뒤 은하의 맞은편에 앉았다. 둘은 한참 동안 말없이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체조부는…많이 힘들어?” 은하가 묻자 유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알고 지낸 기간이 짧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 은하는 남의 사정을 궁금해 하는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힘들기야 하지…그래도 좋아하니까 괜찮아. 선수로 나갈 것도 아니고 취미인데 뭘.” 유리가 대답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너는? 취미 같은 거 있어?”
은하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붉은 태양에 푸른 구름이 휘감긴 채로 지고 있었다.
“별로…취미라고 할 만 한 건 없어.” 각자 주문한 음료가 나오자 은하의 말이 끊겼다.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은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음악 듣는 거랑…독서 말고는 흥미도 없고.”

레몬에이드와 커피가 바닥을 보일 때쯤, 은하는 꽤 많은 이야기를 했다. 평소에 어떤 음악을 듣는지, 책은 뭘 좋아하는지 등등. 하지만 몇 십 년 전에 세상에 나온, 그것도 소녀스러운 외모와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하드 록과 헤비메탈을 왜 듣는지에 대한 대답은 회피하기만 했다.
“그럼, 축제는 어떡할지 생각해 봤어?” 은하는 유리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그냥…도서관에 있으려고. 같이 갈 사람도 없는데…. 아무래도 사람 많은 데는 좀….”
“나랑 같이 가는 건 어때?”
은하는 고개를 들었다. 살짝 벌린 입이 은하의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정말?”
“나도 수경이하고만 다닐 것 같은데…1명이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지 않아?”
그럴 리가, 삼총사도 아니고. 은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유리의 시선을 피했다.
“조금…더 생각해 볼게. 근데, 이제 가 봐야 하지 않을까…? 거의 문 닫을 시간인 것 같은데.” 은하가 말했다.
“그것도 그러네, 슬슬 움직여야….” 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던 순간 중심을 잃고 크게 비틀거렸다. 은하는 그런 유리를 부축했지만 유리는 테이블을 붙잡고 은하의 손을 뿌리쳤다.
“괜찮은 거 맞아?” 은하는 유리가 자신을 뿌리친 게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않기로 했다.
“괜찮아, 별 거 아냐.” 유리는 미소를 지었지만 여전히 한 걸음도 내딛지 못 했다. 다시 조심스럽게 의족을 찬 쪽에 체중을 실었지만 움찔하며 다시 테이블을 붙잡을 뿐이었다.
“안 괜찮은 것 같아….” 은하가 말했다.
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봐도 불만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은하가 따지고 드는 것이 불만인지, 걷기 힘들다는 것이 불만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정말 괜찮아, 너무 걱정 말고 먼저 들어가. 오늘 재밌었어.” 유리의 말은 그것이 끝이었다. 유리는 천천히, 의족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한 발짝씩 내딛으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샤워를 마친 뒤 은하는 침대에 누워 벽을 바라보았다. 달력은 형광등 빛을 받으며 허옇게 빛나고 있었다. 10개의 칸에 줄이 그어져 있었다.
의족으로 바닥을 밟았을 때 유리의 얼굴에는 확실히 고통이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확실했다. 너무 무리해서 상처라도 난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은하는 그만두기로 했다. 은하 자신도 흉터에 대해 말하기 싫어하니 유리도 자신의 상처에 대해 말하기 싫어할 것이다. 그쯤에서 은하의 생각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축제. 몇 번 참여하지도 않았고,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더 많던 행사. 그저 모여서 노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해 도서관에 틀어박혀 보냈던 마지막 축제와 그때 함께 했었어야 했다며 아쉬워하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왜 그 목소리는 기억나면서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걸까. 그저 자신의 망상이었을까?
이 학교의 축제는 어떨까? 아직 나쁜 관계가 생긴 아이들도 없으니 아무도 자신을 건드리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유리처럼 친하게 지내자며 다가온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예의인지 진심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아이들도 있었다. 가식과 본심이 뒤섞인 거대한 집단은 언젠가 책에서 읽은 적 있는 괴물을 연상시켰다. 끈적거리는 녹색 광휘를 번뜩이며 표면에서 끝없이 눈알을 만들어내는, 비틀린 비명을 지르던 거대하고 끔찍한 형체. 은하에게 사람들은 항상 그런 존재였다. 이곳에서도 사람들이 그 괴물이나 마찬가지일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천천히, 은하는 밤이 깊어올 때까지 고민을 거듭하다 잠이 들 때쯤 축제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저 축제일 뿐이다.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들도, 불편해하던 사람들도 없다. 내일 유리에게 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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