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이 낙태 병원 방문 기록을 위치 정보 이력에서 자동으로 삭제하겠다고 밝혔다. 삭제 대상에는 가정폭력 대피소, 체중 감량 클리닉, 카운셀링 센터 등의 방문 기록도 포함된다. 민감한 개인정보 때문이라는 이유를 댔다. 하지만 여성의 24주 이내 낙태권을 보장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대법원의 결정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50여년 전으로 회귀한 대법원의 결정으로 미국 사회는 극심한 분열과 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다. 여성은 임신 중단의 권리를 빼앗긴 채 잠재적 범죄자로의 위험에 내몰렸다. 미성년이나 원치 않는 임신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내 9개 주가 낙태금지법을 발효시켰고, 전체의 절반 이상의 주에서 낙태금지법을 시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위치 정보를 포함한 모든 디지털 기록이 사법당국의 임신 중절 입증 수단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구글의 조처는 주목을 받았다. 불법 행위를 입증할 디지털 시대의 수사기법은 가장 먼저 스마트폰과 앱, SNS, 이메일, 네비게이션 등의 기록을 들여다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구글의 조처가 낙태 문제를 피하기 위한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술회사들은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이용하고, 판매하며 비즈니스 모델로 삼고 있다. 구글이 아니더라도 각종 기기나 프로그램을 통해 누구나 너무나 많은 디지털 기록을 남기며 살아가고 있다. 편리함에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애플이나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아마존 같은 이른바 빅테크가 낙태금지 파문과 관련해 구글과 유사한 조치를 취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이들 거대 기업의 영향력으로 미루어 볼 때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미래 사회를 주도하는 이들 빅테크는 통상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사 직원들을 보호하기 위한 선제적인 조치는 있었다. 이들 빅테크는 예외 없이 낙태금지법으로 피해를 입게 될 직원들이 다른 주로 원정 수술에 나설 경우 비용을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골드만삭스, JP모건, 나이키, 우버, 스타벅스 등도 이 대열에 동참했다. 하지만 낙태 수술 추적에 직접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기술과 정보를 보유한 테크기업들은 보다 적극적인 대처를 할 수 있었다.

미국의 온라인 신문 더 버지(The Verge)는 낙태 관련 기사를 다루면서 빅테크의 상황을 언급했다. 애플은 텍사스 오스틴에 최대 15,000명을 고용하는 캠퍼스를 짓고 있다. 아마존은 버지니아주 알링턴에 새로운 본사를 건축하고 있다. 구글은 노스캐롤라이나주 르노어에 클라우드 컴퓨팅 허브를 운영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플로리다 마이애미에 거대한 사무공간을 새로 임대했다. 모두 낙태금지를 주도하는 공화당 지역이다.

애플 오스틴 캠퍼스 조감도

거대 기술기업들의 낙태금지에 대한 이중적 대응은 기업의 이해관계와 무관하지 않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낙태금지에 직접적으로 반대하며, 공화당과 주정부, 사법당국과 맞대결하는 하는 듯한 모습을 피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낙태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50%를 넘는 상황이지만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빅테크의 데이터 독점에 대한 정치권의 비난과 규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현실이 이를 더욱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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