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21일 새벽 1시 54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축구 경기가 종료되자마자 <‘손흥민 후반 23분 투입’ 토트넘, 첼시에 1-2 패배>라는 제목의 기사가 출고되었다. “토트넘은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첼시의 골망을 흔들지 못하며 1점차로 패했다. 손흥민은 이날 벤치에서 대기하다가 교체 출전했지만 골맛을 보지 못했다.”라고 기사는 끝을 맺는다. 이 기사의 시작 부분에는 ‘(런던<영국> = 연합뉴스) 사커봇’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현지 취재기자도, 번역 기사도 아닌 ‘사커봇(Soccerbot)’이라는 이름의 로봇이 쓴 기사다.
기사 내용의 일부만 인용했지만 전혀 기계가 썼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스코어나 슈팅 수, 반칙 횟수, 유명 선수의 출전 여부 등 객관적인 사실만을 조합해 기사를 만든 게 아니라 스포츠 기자들이 흔히 쓰는 ‘골맛’이라는 맛깔스런 표현까지 사용했다. 국내 언론도 본격적인 로봇 기자 시대에 돌입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파이낸셜뉴스와 헤럴드경제, 이투데이, 전자신문이 증권 시황 기사에 이미 로봇을 도입했지만, 단순 수치 나열에 그치고 대중적인 기사도 아니다.
연합뉴스는 2017-2018 EPL 정규시즌 380 차례의 모든 경기 속보 기사를 ‘사커봇’에 맡기고, 2018년 2월에 열리는 평창동계올림픽 경기 속보도 로봇 기자를 활용할 계획이다. ‘사커봇’의 기사 작성은 데이터 수집과 문장 생성, 어휘 수정까지 세 단계를 거치는데 경기 종료 불과 1,2초 안에 기사 작성에서 출고까지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기사의 오류를 막기 위해 최대 5곳에서 데이터를 받아 대조하고, 기존의 기자들이 쓰던 문장을 학습해 인간 기자가 쓴 기사나 다름 없게 만든다.
미국에서 로봇 기사는 이제 뉴스거리가 되지 못한다. 크고 작은 지진이 많은 로스앤젤레스 지역의 LA타임즈는 지진 발생 기사를 로봇 기자에게 맡겼고, AP통신은 모든 기업의 실적 분석과 프로야구 경기에 로봇 기자를 투입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헬리오그래프(Heliograf)라는 AI 로봇이 2016년 리우올리픽의 실시간 속보를 책임졌고, 대통령 선거 경선 보도에도 이를 활용했다. 구글의 자금 지원을 받은 영국의 프레스 어소시에이션(Press Association) 통신은 로봇 기자가 공공기관의 각종 데이터를 수집 분석해 매달 3만건 이상의 지역 뉴스를 생산하는 프로젝트를 2018년 중에 선보일 예정이다.
로봇 기자뿐 아니라 기자 로봇과 로봇 편집장까지 등장했다. 젊은 여성 모습을 한 중국의 인공지능 로봇 자자(佳佳)는 2017년 4월 신화통신의 기자 자격으로 와이어드(Wired) 창립자이자 세계적인 기술 칼럼니스트인 케빈 켈리(Kevin Kelly)와 사전 각본 없는 화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영국의 가디언은 자사가 발생하는 24쪽의 타블로이드 주간신문 ‘길지만 좋은 읽을거리(The Long Good Read)’에 실어야 할 기사 선택과 지면 배치 작업을 모두 AI 알고리즘에게 맡겼다.
드론에 의한 사진과 영상 취재와 더불어 AI 알고리즘을 활용한 기사 생산 시스템의 확산은 로봇 저널리즘이 이제 본궤도에 접어들었음을 알려준다. 모든 산업 분야가 그렇듯 미디어도 AI 로봇과 공존의 길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다. 2013년부터 기사 작성의 일부를 로봇 기자에게 내준 AP는 그간의 경험을 돌아보는 보고서를 냈다. 인공지능이 대용량의 데이터를 처리하게 도와줌으로써 기자들이 보다 복잡한 뉴스나 고품질의 뉴스를 쓸 수 있게 했을 뿐 아니라 기자들간의 커뮤니케이션과 협력을 증진시키는 효과가 있었다고 적었다. 인공지능이 저널리즘을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저널리즘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요즘 기성 언론은 예외 없이 삼중고를 겪고 있다. SNS로 무장한 개인 미디어가 무섭게 성장하며 영향력을 넓히고 있고, 정보의 독과점이 무너지면서 광고 수익 감소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이 뒤따르며,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수많은 매체들과 무한 경쟁을 벌여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를 처리하느라 긴 호흡의 심층 취재 보도에 대한 열정은 뒤로 밀렸고 비슷비슷한 뉴스가 넘쳐난다. 언론 전반이 하향 평준화의 길을 가고 있다.
로봇 기자는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앞으로 보다 다양한 분야로 그 역할이 커질 것이다. 하지만 저널리즘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기보다는 기사의 대량 생산이나 인건비 절감에 초점을 맞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다. 네이버에 목매는 한국 언론 유통 시장의 현실은 이를 부채질 할 가능성이 높다. 로봇 기자 도입을 투자가 아닌 비용으로만 보는 근시적 경영 마인드가 더해진다면 단순 흥미 위주의 기사를 반복 대량 생산하는 기계로 전락할 수도 있다.
기레기 소리를 듣는 한국 언론의 최대 과제는 신뢰 회복이다. 한국언론재단과 영국의 로이터저널리즘 연구소가 공동 조사한 뉴스 신뢰도 조사에서 한국은 조사 대상 36개국 가운데 꼴찌였다. 베끼기 경쟁이 아닌 독창적이고 수준 높은 기사에 승부를 걸며 언론 활성화의 길을 찾아야 한다. 앞으로 속속 진행될 로봇 기자의 도입은 이를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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