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편에서 이어집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AI >에는 불치병에 걸려 치료약이 나올 때까지 냉동 상태에 있는 아들을 둔 부부가, 슬픔과 미련에서 벗어나기 위해 AI 로봇을 입양하는 설정이 나옵니다. 인간을 사랑하도록 프로그래밍된 AI 로봇, 데이빗은, 모니카(양엄마)를 진실로 엄마로 여기며 사랑을 키워 나갑니다. 그런데 생명을 되살릴 수 없다고 생각한 아들 마틴이 기적적으로 살아서 돌아오자, 친아들과 로봇 양아들에 대한 양립할 수 없는 ‘사랑’에 갈등하던 부부는 결국 데이빗을 내보내게 됩니다.

socialrobot6

영화, <AI>는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녹고 해안 도시들이 물에 잠겨버린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인간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로봇들이 인간을 온전히 대체한 세상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의 감정을 오롯이 가질 수 있는 로봇은, 데이빗이 처음이었습니다. 데이빗 이전의 로봇들은 육체적으로나 감각적으로는 인간과 거의 동일하게 발전했지만, ‘사랑’과 같은 인간의 감정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나옵니다. 어쩌면 로봇이 온전히 인간의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영화의 설정처럼 우리가 가늠하기 힘든 아주 먼 미래에야 가능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최근 인간에 더 가까이 진화한 소셜로봇이 우리와 더 친근하게 감정을 교류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온전한 인간의 감정을 가졌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세간의 일부 전망처럼 앞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기술이 급진적으로 발전하여 로봇의 능력이 인간을 초월하는 특이점이 오더라도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가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따라서 소셜로봇은 그 자체로는 오랜 시간 동안 인간에게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남을 가능성이 큽니다.

소셜로봇, 인간과 도구의 새로운 관계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소셜로봇의 진화에 대해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지점은 만만치 않게 깊고 넓습니다. 소셜로봇은 인간이 대상화해 온 그 동안의 도구나 기기들과는 확연히 다른 점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에 수동적으로 작용하던 도구들과는 질적으로 다르게, 자율적인 상호작용이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출발에 불과한 소셜로봇이 앞으로 인간과의 관계에서 만들어나갈 양상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획기적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컴퓨팅기술, 인공지능과 로봇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삶에 가져올 변화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모습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소셜로봇은 기존의 가족 구조가 해체되고 있는 사회현상과 맞물려 수요가 급증할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오는 관계의 피로에서 벗어나고 싶어하거나, 여러 이유로 가족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소셜로봇은 중요한 대안적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가사도우미, 학습도우미, 개인 비서와 같은 조력의 역할에서부터 사물인터넷 시대의 네트워크 플랫폼, 다양한 정보 제공 기능을 병행할 수 있습니다. 충실한 말벗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동반, 돌봄과 케어까지 소셜로봇의 진화는 사실 인간의 욕구가 멈추지 않는 한 계속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렇게 된다면 소셜로봇은 사용자에게는 단순히 편의와 즐거움을 주는 존재를 넘어서 삶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하는 소중한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나 반려동물을 대신해서 소셜로봇이 어느 누구에겐가는 가장 소중한 동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지나친 비약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전까지 인간에게 도구적 존재에 불과했던 여타의 기기들에 비해 소셜로봇은 분명 인간과 기기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방의 작용에서 쌍방의 작용으로 관계의 진화가 이루어진 것만은 분명합니다.

소셜로봇, 그리고 인간소외

기본적으로 사용자인 사람에게 소셜로봇은 충실한 존재가 됩니다.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 보면 로봇의 가장 큰 매력은 사람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거스르지 않는 충실한 존재, 어쩌면 충복이라고 해야 하는 로봇을 우리가 반려의 존재나 동반의 존재로 볼 수 있을까요?

반려나 동반은 말 그대로 삶을 나누는 짝을 뜻합니다. 하지만 이 단어들의 뜻은 훨씬 확장되어 쓰입니다. 어느 대상,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소셜로봇은 분명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대상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충분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과연 소셜로봇이 행하는 인간과의 상호작용이 진정한 의미의 관계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래 상호작용이라는 것은, 서로의 작용이 주체적으로 이루어져야 참된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의 작용에 대해 분명 반응하고 응대할 것이지만 로봇은 상호작용의 주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지능형로봇, 감성로봇, 소셜로봇이 기술의 진보를 통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영역까지 진화한다고 하더라도 로봇이 주체가 된다면 그 상태는 로봇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본질적으로 로봇은 로봇의 한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로봇이 인간과의 상호작용이나 관계에서 주체가 될 수 없다면, 로봇을 동반이나 반려로 인정할 수 있을까요? 교류와 교감, 상호작용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주체적 대상이 아닌 존재가 삶의 동반이나 반려가 될 수는 없습니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동반의 관계로 부를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반려동물의 사례에서도 보듯이 이러한 주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사람들은 이들을 반려와 동반으로 인식한다는 데 있습니다. 주체가 될 수 없는 물질적 대상을 동반적 존재로 생각하게 되는 데에는 인간의 편의적 사고가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는 가치의 전도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되어 온 물신주의는 인간의 사물화만이 아니라 사물의 인간화까지 불러 왔습니다. 우리는 이런 전도된 가치를 ‘소외’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있어야 할 빈 자리에 로봇이 들어올 것입니다. 로봇이 대신한 자리가 늘어갈수록 인간의 자리는 사라질 것입니다. 인간이 있어야 할 자리에 로봇을 두고, 도구가 아닌 주체로 인식하는 것은, 로봇이 아니라 결국 인간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이러한 전도된 현상이 결국 인간으로부터 인간을 배제해 나갈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소셜로봇 시대의 인간의 가치

소셜로봇을 동반적 존재로 인식하고 살아갈 것이라는 전망은 기우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진실로 앞으로도 그렇게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인간은 자신이 만든 기술과 도구를 비교적 적절히 통제해 나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로봇과 함께 살게 될 수도 있는 미래의 아이들의 경우에는 양상이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socialrobot8

여태껏 기술 문명은 전 방위적으로 우리 삶을 변화시켜 왔습니다. 로봇이 아직은 생경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로봇의 탁월한 편의와 기능에 맛들이면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 될 것입니다. 기술의 속성상 인간의 힘듦을 더욱 빠르게 대체해 나갈 것입니다. 양육은 인간에게 큰 기쁨임과 동시에 가장 힘든 과정이기도 합니다. 기쁨은 기쁨대로 누리면서 힘듦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은 어린 아이들 곁에 로봇이 함께 할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이 됩니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오랜 시간을 로봇과 함께 살아갈 다음 세대에게 로봇이라는 존재는 무시할 수 없는 생의 반려로 인식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지금껏 우리가 지녀온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조건들은 상당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려움과 갈등 속에서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공존에 초점을 맞추어 왔던 지금까지의 인간 윤리가 그대로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해 주고 들어주는 존재가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라 로봇이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로봇의 급진적 진화는 인간 존재의 왜소화를 초래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될 경우, 믿음, 우정, 공감과 같은 인간적 가치를 우리는 로봇에게도 적용해야 합니다. 이는 인간 본연의 가치에 대한 혼란임에 분명합니다.

인간의 죽음과 로봇 윤리

반려동물의 죽음은, 가족처럼 함께 한 사람들에게는 크나큰 고통과 상처를 줍니다. 이른바 ‘펫로스 증후군(Pet loss syndrome, 반려동물의 죽음으로 겪는 상실감과 우울증과 같은 고통스러운 증상)이 있을 정도로 가볍지 않은 현상입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반려동물의 문제를 소셜로봇이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합니다. 분명 가능성 있는 예상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생명을 지닌 반려동물을 로봇이 온전히 대체할 수 없지만, 달리 생각하면 반려동물에 대한 부담감이 로봇으로 향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반려동물의 경우, 사람보다 더 일찍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운 반면에, 반려로봇의 경우에는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수명이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두 존재는 상반된 지점에서 우리에게 가볍지 않은 고민을 남깁니다. 인간에 더 가까울수록, 오랜 세월을 함께 할수록 반려로봇은 점점 더 인격화되어 물질적 존재 그 이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죽지 않는 로봇 문제는 간단치 않은 문제로 남게 됩니다. 인간이 떠나고 남은 자리에 로봇이 남는다면 우리는 이 로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로봇이 단순한 기기이고 물건이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고민을 안길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이들에게 인간에 가까운 윤리와 가치를 적용할 수 있을까요?

올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분 당선작인 <아빠의 유언장(성현정 작)>에는 노년의 삶을 로봇에 의지해 살다가 죽은 아버지가 인간인 아들을 대신해서, 유산과 유언을 로봇에게 남기고 떠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신의 친아들보다 더 가까운 로봇 양아들이 아빠의 유산과 유언장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단순히 동화 속 현실이라고 멀리할 문제는 아닙니다. 소셜로봇의 진화는 필연적으로 로봇에 대한 새로운 윤리를 요구할 것입니다. 로봇이 인간에 더 가까이 다가올수록 우리의 로봇에 대한 고민거리는 늘어갈 것입니다. 소셜로봇처럼 인간화되어 가는 기기가 우리의 삶에 커다란 난제를 던져 줄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편의를 위한 것이었지만 종국에는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대상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꼭 영화 속 이야기는 아닐 수 있습니다.

socialrobot11

소셜로봇 시대와 인간의 존엄  

사실, 지금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로봇 기술의 발전은 소셜로봇으로 집약되어 갈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부터의 로봇은 당연히 소셜로봇일 수밖에 없어서 특별히 ‘소셜’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될 날이 곧 다가올 것입니다. 모든 로봇은 사람과 소통하고 대화하며 정서적 반응을 보이는 방향으로 진화할 것입니다.

로봇이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세상이 올지는 미지수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인간의 삶 곳곳에 로봇이 우리 곁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으리라는 점입니다. 지금껏 기술의 진보가 보여준 역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로봇 세상은 거부하기 어려운 흐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인공지능과 로봇 이전의 시대와 그 이후의 시대는 결코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이루어 온 기술의 역사에서 이렇듯 확연한 분기점은 없었습니다. 기술이 선사하는 환상적인 편의라는 측면에서도 그러하지만, 기술이 몰고 올 가공할 위협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인간에 더 가까이 다가오는 소셜로봇 시대에 우리는 과연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 질문에 앞서, 인간의 가치와 존엄은 과연 무엇인지, 혹은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해 물어야 하는 게 옳은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렇듯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로봇세상의 미래가 기존의 경험과 지식으로는 전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경이로운 기술의 진보를 만들어낸 인간의 능력이, 인간의 존엄을 향해서도 빛을 발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인쇄하기
이전
다음
4+

소요 사이트를 방문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액수에 관계없이 여러분의 관심과 후원이 소요 사이트를 유지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후원금은 협동조합 소요 국민은행 037601-04-047794 계좌(아래 페이팔을 통한 신용카드결제로도 가능)로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