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3일, 대한민국 통신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휴대전화를 새로 개통하거나 명의를 바꾸는 과정에서, 신분증 확인에 더해 실시간 얼굴 촬영을 통한 ‘안면 인증’이 추가로 요구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이를 보이스피싱과 명의도용에 악용되는 ‘대포폰’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하며, 12월 23일부터 시범 운영을 거쳐 2026년 3월 23일 정식 도입을 예고했습니다. 

명분은 강력합니다. 경찰청 통계로 2025년 1~10월 보이스피싱 피해액이 1조 원을 넘어선 것으로 보도되면서, “불편하더라도 내 돈부터 지키자”는 여론은 쉽게 형성됩니다.    문제는 바로 그 지점입니다. 범죄 예방이라는 ‘즉효성’이 프라이버시와 기본권의 ‘구조’를 바꿀 때, 우리는 범죄자를 겨냥한 정책을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모든 시민을 감시 인프라의 입력값으로 편입시키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중국을 닮아가는 통신 본인확인, 감시 사회의 경계선

휴대전화 개통 단계에서 안면 인식을 사실상 강제한 대표 사례로 중국이 자주 언급됩니다. 중국은 2019년 말부터 통신 가입 과정에서 얼굴 스캔을 요구해 왔고, 이는 “사기 근절”이라는 명분과 별개로 감시 인프라 확장의 상징처럼 읽혀 왔습니다.  더 주목해야 할 대목은 역설적으로 중국 내부에서도 ‘강제’에 대한 반발과 부작용이 누적되면서, 안면인식을 반드시 강요하지 말고 대체 수단을 제공하라는 방향의 규제 강화 움직임이 함께 보도된다는 점입니다. 

한국이 지금 택한 방식이 서구식 ‘최소 수집·선택권 보장’ 모델이 아니라, 최소한 외형상으로는 중국식 ‘보편 서비스에 생체정보를 얹는’ 모델에 가깝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통신은 사실상 생필 인프라입니다. 생필 인프라의 입구에 생체정보 인증을 붙이는 순간, 그 다음 문은 금융, 교육, 의료, 공공서비스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판옵티콘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지 않습니다. “여기 한 번만”이 누적될 때, 감시는 생활양식이 됩니다.

얼굴은 ‘영구 비밀번호’입니다

이 제도의 가장 민감한 지점은 보안입니다. 비밀번호가 털리면 바꾸면 됩니다. 신분증이 도용되면 재발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얼굴은 바꿀 수 없습니다. 정부는 “신분증 사진과 실시간 얼굴을 대조할 뿐이며, 인증에 사용된 정보는 별도 저장하지 않고 즉시 삭제한다”는 취지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시민이 불안해하는 이유는 ‘지금 저장하느냐’보다 더 근본적입니다. 첫째, 보안사고의 가능성은 외부 해킹뿐 아니라 내부자·운영오류·위탁 구조 어디에서든 발생할 수 있고, 둘째, 생체정보는 한 번 유출되면 사후 복구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딥페이크의 시대입니다. 과거엔 주민번호·신분증 이미지가 악용됐다면, 앞으로는 고해상도 얼굴 데이터가 악용될 수 있습니다. 생체정보가 ‘한 번 더 안전한 인증’이 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한 번 털리면 끝’인 공격 표면이 되기도 합니다. 범죄 예방을 위해 가장 위험한 원료를 더 넓은 경로로 유통시키는 정책은, 그 자체로 모순을 안고 출발합니다.

범죄자보다 시민이 더 크게 비용을 낸다

실효성도 냉정하게 따져야 합니다. 대포폰은 범죄 조직의 산업 인프라입니다. 인증 장벽이 높아지면, 그들은 노숙인·취약계층을 동원해 ‘직접 얼굴을 찍게 하는’ 방식으로 우회할 수 있고, 다른 채널·다른 국가·다른 회선을 찾는 방식으로 적응할 것입니다. 결국 이 제도는 숙련된 범죄자에게는 ‘거슬리는 절차’ 하나를 추가하는 데 그칠 수 있지만, 선량한 다수에게는 “통신을 쓰려면 얼굴을 제출하라”는 새로운 표준을 강요합니다.

안전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안전을 이유로 자유의 핵심을 내주는 사회는, 장기적으로 더 안전해지지 않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도입이냐 철회냐”의 이분법이 아니라, 적어도 다음의 질문에 대한 공개적이고 검증 가능한 답입니다. 통신과 같은 보편 서비스에서 생체정보 인증을 요구한다면, 대체 인증 수단 선택권은 어디까지 보장되는가. 인증 과정에서 생성·처리되는 데이터는 어떤 기술적 방식(온디바이스 처리, 위탁 구조, 로그 정책 등)으로 최소화되는가. 제도가 다른 영역으로 확장될 때 이를 제어할 법적 방화벽과 독립적 감사는 준비돼 있는가.

범죄를 막겠다는 목적이 정당하다고 해서, 그 수단이 자동으로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 얼굴은 국가 행정의 편의와 기업 프로세스의 효율을 위해 제출되는 ‘공용 키’가 아닙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얼굴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의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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