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 아카데미쿱과 협동조합 소요는 아이들이 넘치는 정보 속에서 ‘참과 거짓’, 그리고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력을 키워주기 위한 철학교육의 방향성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그 교육의 기록입니다. 시작은 미미하지만, 우리 교육에 새로운 철학교육을 위한 문제 의식과 모델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 실험에는 아카데미쿱의 다섯분 젊은 선생님들과 소요의 전문가들이 함께 합니다.”


개요

• 제목 : 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입니까?

• 주제 : 공정, 정의, 플라톤, 국가

• 교재 :  <Philosophy for Kids> David A. White, Ph.D./<철학하는 십대가 세상을 바꾼다>

• 대상: 강동 항일초등학생

• 멘토: 아카데미쿱 심우열


오늘부터 새로운 교재 수업을 시작한다. 아이들에게 따끈따끈한 새 학습지를 나눠주었다. 아이들은 학습지를 잠시 뒤적뒤적하더니 금새 답답해했다. 이전 학습지에 비해 글자가 너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교재와 학습지가 분리되어 있다가, 그 두 가지가 합쳐진 교재를 처음 받았으니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수업을 재미없어 하거나 힘들어할 것 같다는 걱정은 전혀 들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는 아이들이 이 정도 난이도의 수업은 너끈히 해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이 생각하는 깊이와 말하는 내용으로 미루어봤을 때, 적절한 지적 자극이 주어지면 아이들이 그것을 자양분 삼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번째 이유는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수업에 집중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약간의 지적 자극만 주어도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의견을 쏟아낸다. 이 수업은 내가 지식을 전달하는 것보다는 아이들이 말을 많이 할수록 더 좋은 수업이 된다.

학습지를 펼치고 목차를 읽었다.

  1. 나는 정의로운 사람일까?
  2. 친구와 친구가 아닌 사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3. 노력은 보상받아야 할까?
  4. 우리를 괴롭히는 사소한 문제를 내버려두어야 할까?
  5. 남을 꼭 도와줘야 할까?
  6. 노는 것이 공부하는 것보다 행복할까?
  7. 거짓말은 해도 될까?
  8. 폭력도 정당화될 수 있을까?
  9. 왜 우리는 다른 사람과 있을 때 가끔 어색할까?
  10. 우리가 기술을 지배할까, 기술이 우리를 지배할까?

이 책은 챕터가 총 30개다. 이번에는 일단 그 중에서 10개만 추렸다. 이 10개의 챕터는 철학 중에서도 ‘윤리학’에 속하는 내용을 다룬다. 각 챕터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이 활동했던 시대 순으로 배치되어 있기도 하고, 공동체주의에서 개인주의로 나아가는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책이 꽤 잘 기획된 것 같다. 몇몇 아이들은 이게 문제인 줄 알고 풀기도 했다.

오늘 우리는 ‘나는 정의로운 사람일까?’라는 주제를 다룬다. 교재는 하나의 질문으로 시작된다.

“나는 친구에게 계산기를 빌렸다. 친구는 그것을 돌려달라고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일까?”

아이들은 질문을 보자마자 갑론을박했다. 질문에 대해 토론하기에 앞서, 친구들에게 물건을 빌려줬는데 못 받은 적이 있는지, 아니면 친구로부터 물건을 빌려놓고 안 갚은 적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예은, 선유 : 짝궁이 내 학용품을 마음대로 빌려가서 쓰고는 나에게 돌려주지 않는다.

종민 : 친구에게 돈을 빌려줬다. 갚기 힘들다고 해서 갚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민준 : 친구에게 샤프를 빌렸다. 그걸 가지고 놀다가 망가트렸다. 하지만 친구에게 샤프를 새로 사주지 않았다.

종민이의 야이기를 듣고, 친구들은 종민이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민준이는 괜한 인성 논란에 휩싸였다. 하지만 민준이와 민준이의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갔다.

“나는 친구에게 계산기를 빌렸다. 친구는 그것을 돌려달라고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일까?”

네 개의 보기를 주고 각자 답을 선택해보도록 했다.

A. 친구에게 내가 여전히 계산기가 필요하다고 설득한다. : 민준

B. 언젠가 계산기가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오래 가지고 있는다.

C. 돌려준다. 계산기는 내 것이 아니라 친구 것이니까 : 홍지유, 선유, 예은, 김지유, 채원, 종민

D. 친구는 또 사귈 수 있다. 계산기를 그냥 가진다.

예상대로 C를 택한 사람이 많았다. ‘남의 물건을 빌렸으면 돌려준다’라는 사고방식은 보편적인 도덕원칙에 부합하는 것 같다. A는 다소 이기적인 태도로 느껴진다. 민준이는 나름대로 A를 택한 이유가 있었다. 예전에 한 친구가 민준이의 지갑에서 돈을 몰래 가져간 적이 몇 번 있었다고 한다. 한 번은 그 친구가 5만원이나 되는 큰 돈을 가져갔다. 민준이는 화가 나서 그 친구에게 따졌지만, 친구는 뻔뻔하게 버텼다고 한다. 다행히 그 친구의 엄마가 민준이에게 대신 사과하며 5만원을 돌려주었다. 민준이에게는 그 일이 힘든 기억으로 남은 것 같다. 물론 ‘그런 일이 있었다’라고 해서 ‘그런 행동을 해도 된다’라는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민준이는 그 두 가지가 아직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다. 김지유는 여기에 대해 누구와도 다른 코멘트를 추가했다. C를 택했다고 해도 그것이 정의로운 것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빌린 물건을 돌려주지 않는 사람이라고 소문이 퍼지면 친구를 사귀기 힘들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른다. 주어진 전제를 뒤집는, 아주 훌륭한 코멘트였다. 오늘 수업의 큰 줄기에서는 살짝 벗어나지만 철학적으로는 의미 있는 생각인 것 같다고 칭찬해주었다.

‘다른 사람에게 빌린 물건은 돌려줘야 한다’라는 이야기는 플라톤이 쓴 <국가론>이라는 책에 나온다. 아이들에게 이 책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옛날 그리스에는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매일 같이 길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고, 토론을 벌였다. 아이들은 정말 귀찮은 사람이 인 것 같다며 싫어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결국 그는 그리스 청년들을 나쁜 길로 인도한다는 죄목으로 독약을 먹는 형벌에 처해졌다.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중의 한 명이었다. 플라톤은 스승이 사형당한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충격을 잊기 위해 주변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리스로 다시 돌아와서 소크라테스가 그리스 사람들과 대화한 내용을 책으로 엮어 출판했다. 그 중에서도 <국가론>은 매우 두꺼운 편에 속한다.

<국가론> 1권에 나오는 한 대화에서, 어떤 사람이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 빌린 만큼 갚는 것, 은혜를 받았으면 그것에 보답하는 것, 심지어 내가 한 대 맞으면 똑같이 한 대 돌려주는 것, 이 모든 것들은 ‘공정’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다른 사례를 들어 이 주장을 반박한다.

“아빠가 한 친구에게서 무기를 빌렸다. 시간이 흐른 후에 그 친구는 무기를 돌려받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친구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져서 무기를 돌려주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이 경우에도 무기를 친구에게 돌려주는 것이 정의로운 행동일까?”

이번에도 네 개의 보기가 있다. 아이들로 하여금 답을 택해보도록 했다.

A : 무기를 돌려주지 않는다. 친구가 불안한 상태이기 때문에 무기를 돌려받으면 무슨 일을 할지 모른다. : 홍지유

B : 무기를 돌려준다. 어찌 되었든 그것은 친구의 것이니까.

C : 철학자에게 상황을 이야기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정의인지 물어본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정의인지 알 수 있으면,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도 알 수 있다. : 김지유, 종민

D : 친구에게 도움이 되는 전문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한다. : 예은, 민준, 선유

A를 택하면 위험한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앨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정의’의 개념에는 어긋난다.

B를 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앞의 계산기 사례에서 C를 택했던 사람은 여기서 B를 택하는 게 일관적이다. 하지만 정신이상자에게 위험한 무기를 돌려주는 건 그게 아무리 공정하다고 해도 정의로운 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정의’의 개념에는 ‘공정함’뿐만 아니라 뭔가 더 포함되는 것 같다.

D를 택한 사람들에게서는 친구를 아끼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정의’로운 행동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사고 실험에서는 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C를 택한 사람들에게,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찾아가볼 것을 추천한다. 소크라테스가 정답을 아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 생각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는 있다.

채원이는 ‘정의’가 뭘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답을 쉽게 정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러다가 새로운 보기를 하나 제출했다. ‘친구에게 그 무기가 왜 필요한지 물어본다.’라는 것이었다. 친구가 물건의 원래 주인이었으니 그의 생각을 한 번은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김지유와 홍지유는 추가적인 질문을 했다. 김지유는 ‘받은 만큼 돌려주면 싸움이 끝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공정함’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말이었다. 김지유는 어린이집에서 만난 친구와 티격태격 싸우기 시작했다. 내가 한 대 맞으면 그 친구를 한 대 때리는 식이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싸움이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기만 했다. 한 쪽이 만족스러우면 다른 한 쪽이 억울해서 꼭 한 대 더 때리거나 했다. 서로 똑같이 한 대씩 때리는 것뿐만 아니라 무엇으로 때리는지, 얼마나 세게 때리는지, 어디를 때리는지 등등까지도 동등하게 맞춰야 완전히 공정한 것이다. 홍지유는 ‘꼭 정의로워야 하나요?’라고 물었다. 정의로운 삶을 살려고 지나치게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편하게 살면 어떠냐는 질문이었다. 그러게, 옛날 철학자들은 왜 사람들보고 정의롭게 살라고 했을까. 앞으로 계속해서 깊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생각 더하기> 질문으로 넘어갔다. 첫 번째 질문은 ‘우리는 친구뿐이 아니라 적에게도 정의로워야 할까요?’였다. 쉽게 말해 내가 싫어하는 사람까지도 내가 정의롭게 대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홍지유 : 사람이라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정의롭게 대해야 한다.

예은 : 싫어하는 건 감정이고, 정의롭게 대하는 건 원칙의 문제다. 싸울 땐 싸우더라도 대상을 구분해야 한다.

종민 : 정의롭게 대해야 한다. 후대의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민준, 김지유 : 적이 정의롭지 않을 수도 있다. 상대가 어떻게 하느냐에 맞춰서 대응하겠다.

채원 : ‘정의’가 뭔지 모르겠어서 답을 내기 어렵다.

두 번째 질문은 ‘자기 자신에게 정의롭지 않을 수 있나요?’였다. 내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하거나,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등의 행위에 대한 평가를 내려 보는 질문이다.

O : 민준, 김지유, 선유, 홍지유, 예은(사람은 자기 양심을 속일 수 있다. 학교에서 수업 시작종이 쳤는데 선생님에게 그걸 알려주지 않는다거나, 학원에서 몰래 간식을 먹는다거나)

X : 종민(내가 뭘 하는지 나는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불안하다)

아이들의 도덕적 판단 기준을 엿볼 수 있는 대답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굉장히 흥미로웠다. 예상했던 대로, 아이들은 수업이 진행될수록 수업에 깊이 몰입했다. 철학 수업을 하는 동안은 아이들의 대답에 대해 내가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내리는 건 최대한 자제하고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부담 없이 꺼낼 수 있도록 도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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