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Barbie)인형을 생산하는 완구업체인 마텔(Mattel)사에서는 아이들만을 위한 인공지능비서인 ‘애리스토틀(Aristotle, 아리스토텔레스의 영문명)’을 곧 판매할 예정이라고 했다. 2017년 라스베가스 소비자가전박람회(CES)에서 소개되기도 한 이 제품은 아이들의 발음이 명확하지 않고 또한 화법이 어른들의 그것과는 다른 점에 착안해서 개발되었다고 한다.(IT뉴스, 일자리 4.0과 직업교육, 김들풀 기자, 2017.3.16 )
마텔측은 아이들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인공지능도 이에 맞춰서 학습을 더해가게 되므로, 영유아기 시절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이 되어서도 함께 할 수 있는 동반자로 자리매김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했다. 마텔 측이 노리는 것은 단순한 아이들용 인공지능비서 그 이상인 것으로 보인다. 이미 ‘바비’인형이나, ‘토마스와 친구들’ 그리고 ‘핫 휠(Hot Wheels, 작은 자동차를 이용해서 자동차경주를 할 수 있는 완구)’등의 제품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인공지능이 결국에는 이러한 제품들에 결합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소요 협동조합 글 참조)
어린 아이들은 자신의 장난감에 대해 ‘인격화’하는 경향이 있다. 단순한 인형이나 장난감에도 이름을 붙여주고 자신의 친구로 삼는 경향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인형이나 장난감이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감정을 주고 받는 것으로 인지한다면 이들 상품의 흡인력은 지금보다 훨씬 더 커지게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다. 때문에 향후 인공지능시대에 생존하려면 상상력과 창의적인 힘이 강한 아이가 필요하다. 창의적인 아이만이 미래의 직업을 가질 확률이 높다.
그럼 창의적인 인간은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가? 주관적이긴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창의적 발상과 발칙한 상상력은 나오기 힘들다. 왜냐하면 창의적인 힘은 어렸을때의 교육 환경과 습관에서 이미 결정되기 때문이다. 지금 50대후반의 사람들은 과거의 성공 또는 실패 한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설계하기 때문에, 즉 고정된 틀에 박혀 있기 때문에 창의력과 상상력은 빈곤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공교육을 잘 이수한 사람들과 공무원들에게서 창의적인 발상이 나오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들은 모두 타인이 기획한 프레임 속에서 교육받고 훈련받았다. 즉 자기 주도적 창조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다. 사실 공교육을 잘 이수한 사람들은 지금까지는 잘 살아왔다. 하지만 미래는 다르다. 20년후 우리의 아이들은 어떤 직업을 찾을 수 있을까? 과거의 성공모델에 집착한 교육환경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향후 백수(?)가 될 확률이 매우 높다. 국내외 기업들이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탁월한 인재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창의력과 상상력이 탁월한 아이는 어떻게 만들어 질까? 많은 분야의 접목이 필요하겠지만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교육)환경의 재구성이다. 어떤 환경인가? 아이가 어릴수록 부모의 통제와 간섭이 적은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즉 초원(사막)환경이다. 타인의 눈과 명령을 벗어난 공간에서 스스로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인식이 있을때, 아이들은 최고의 몸과 뇌를 만들 수 있다. 초원 환경은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고 몰입하게 만드는 환경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그것을 반복적으로 몰입하게 되면 즐기는 수준으로 올라간다. 공자도 말했듯이 즐기는 사람을 당해낼 수가 없다. 즐기는 것은 뚜렷한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그냥 습관처럼 하는 것이다. 목적을 가지고 하는 것(공부/놀이/관계)은 일정정도의 효과는 볼 수 있으나 최고의 수준으로 도달하기는 힘들다. 목적없이 즐기는 것에서 인내력과 디테일, 창조성과 상상력은 출현한다.
미국의 한 대학연구팀에서 동물의 지능 한계를 알아보려고 침팬지에게 영어단어를 4년간 140개를 (수화)가르쳤다고 한다. 어느 날 자기의사 표현을 유도 하자, 침팬지는 인간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Let me out!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생명이 있는 동물들은 ‘자유’를 우선한다는 것이다. 자유가 있는 일상, 거기서 주인의식과 창의력은 나온다. 틀에 짜여진 놀이와 수업은 아이들을 지치고 포기하게 만든다. 아이들은 재미 없으면 결국 하지 않는다. 그게 아이들의 특징이다. 이때 부모의 역할이 필요하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파악하여 거기에 적합한 놀이 환경과 재료를 주어야 한다. 인간은 아이들이건 어른이건 재미있어야 오래한다. 호르몬(도파민)이 나오기 때문이다. 긍정적 호르몬의 배출과 순환이 창의성과 상상력의 열쇠다. 활발한 몸과 번뜩이는 뇌를 만들어주려면 좋아하는 놀이환경을 만들어 주면 된다. 대신 간섭하면 안된다. 이제 그만! 이라는 ‘안돼 교육’을 버려야 한다. 15세 전까지는 이것이 중요하다. (고리들, 인공지능과 창의성, 북리슨, 2016 참조.)
어렸을 적 좋아하는 놀이를 타인의 간섭없이 몰입해 본적이 있는 아이와 그런 경험이 없는 아이는 미래 인공지능과의 공존에서 매우 다른 삶의 형태를 지향하게 된다. 오늘날까지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삶은 보편적으로 다 잘하는 것이었다.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는 사람! 대학에서 올 A+을 받은 학생을 본 적이 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장학금을 위해서 또는 칭찬을 받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모든 과목을 최우수 등급을 받아야만 했던 몸과 뇌. 다행히도 미래 사회에서는 그런 학생들을 원치 않는다. 자신만의 초능력 분야가 있는 인재를 원한다.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분야를 할 수 있는 사람, 미래 사회는 그런 사람을 원한다.
아이일수록 몰입하는 교육을 먼저 해야한다. 좋아하는 분야를 찾아 그것만 계속하는 것이다. 거기서 창조와 상상력 그리고 디테일의 경험을 하는 것이다. 아이를 교육하는데 있어서 인내심은 부모들의 가장 큰 적이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제일 참지 못하는 것들 중의 하나가 ‘밥’이다. 두 부류의 부모가 있다. 아이 꽁무니를 죽어라 쫓아당기며 밥을 먹이는 부모와 그냥 내버려 두는 부모다. 전자의 경우는 본인들이 과거에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이고, 후자의 경우는 배고프면 스스로 먹겠지, 하는 초원형(방임형)의 경우다. 그런데 대부분의 부모는 전자의 경우를 택한다. 자신들의 부모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신들을 쫓아다니며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히고, 신을 신겨서 학교에 보낸 기억을 떠 올리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억과 경험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 시대에는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곤란하다. 밥을 먹이고 양말을 신겨서 차에 태우고 학교에 보내면 그 아이는 평생 부모와 함께 살 가능성이 아주 높다. 재앙이다.
영화 <쿵후 선생>(推手, Pushing Hands, 대만, 1995)에서는 미국에 사는 손자와 함께 아침밥을 먹던 중국인 할아버지(주선생)가 화내는 장면이 있다. 아침 식사시간에 아이의 산만함을 보다 참지 못한 할아버지가 아들과 며느리를 보면서 한 마디 한다. “밥 먹는데도 저렇게 산만하고 몰입을 못하는데 인생을 어떻게 살꼬?”
아이는 스스로 밥을 먹고 학교를 가야 한다. 거기에 혼자 음식을 만들줄 아는 아이로 키워야 한다. 그런 아이들이 자기주도적인 삶을 기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끝내 기다려서 스스로 시간을 조절하고 놀이를 결정할 수 있는 아이로 만들어야 한다. 갇혀 있는 삶은 위험이 없고 안정적일수는 있느나, 틀을 깨는 상상력과 창의적인 발상이 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모든 지구의 아이들이 비슷한 생각을 품는 시대는 지났다.
글을 읽고 새롭게 도래한 디지탈 세상 속의 자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음 글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