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에 전시에 갔다가 ‘아, 저 그림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중얼거린 순간이 있다. 한국 수묵화의 대가인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의 <추강모연(秋江暮煙)>(1952), 가을날 어스름이 깔리는 강가 풍경 앞에서였다. 조각배 위에서 화로를 피우고 밥을 해 먹는 것인지 차를 끓이는 것인지, 연기가 안개 속에 피어오르는 고즈넉한 분위기에 젖어 한동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연기의 매캐한 냄새가 어느 찰나엔가 코끝을 스쳤던 것도 같다.

롬바드와 디턴(Matthew Lombard & Teresa Ditton, 1997)은 몰입감을 지각적 차원과 심리적 차원으로 나눈다. 지각적 몰입감(perceptual immersion)은 가상적 환경이 이용자의 지각 체계를 장악한 상태를 가리킨다. 한편, 심리적 몰입감(psychological immersion)은 이용자가 매개된 환경에 스스로 몰두하여 실재감을 느끼는 상태다.

이를테면, 소설을 읽으며 이야기에 취해 삼매경에 빠지는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터다. 추상적 문자를 매개로 가상적 세계에 끌려 들어가는 경험은 심리적 몰입감이 주축을 이룬다. 한편, 시청각 정보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영화는 소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각적 몰입감이 강화된다. 이상적으로는 지각적, 심리적 몰입감이 모두 충족될 때, 이용자의 몰입감은 최고조에 이른다.

<추강모연> 앞에서 연기의 매캐함을 느끼는 경험은 시각 정보를 매개로 심리적 몰입감이 작동했기 때문이리라. 멀끔한 미술관 안에 화재경보기도 울리지 않았고 스프링클러도 작동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VR 영상 <달리의 꿈(Dreams of Dalí)>(2016)은 지각적 몰입감을 극대화시켜 이용자를 달리의 그림 안으로 밀어넣는다. 가상현실 관련 기술이 발달하고 시청각 정보의 입출력장치가 정교해지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달리의 작품 <밀레의 만종에 대한 고고학적 회상>(왼쪽)과 VR 영상 <달리의 꿈> 중 한 장면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는 밀레(Millet)의 <만종(晩鐘, L’Angelus)>(1857-1859)에 나오는 두 인물이 높다란 조각상으로 서 있는 풍경을 상상하며 <밀레의 만종에 대한 고고학적 회상(Archeological Reminiscence of Millet’s Angelus)>(1933-1935)을 그렸다. <달리의 꿈>에서 이용자는 달리의 ‘고고학적 회상’ 속으로 들어가 360도 가상공간에서 두 석상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 영상에서 석상은 엄밀히 말해 조각상이 아니라 벽돌을 쌓아올린 거대한 돌탑이다. 그 안에는 달리가 제작한 바 있는 바닷가재 전화기가 맥락없이 때르릉 울리는 중이고, 돌탑 밖에서는 달리의 작품에서 낯이 익은 다리 길쭉한 코끼리들이 어슬렁거린다. 이용자는 돌탑 내부에 나선형으로 구축된 돌계단을 오르는 대신 수직으로 공중부양하여 광막한 들판을 조망하게 된다.

이 작품은 미국 플로리다의 달리 박물관에서 열린 ‘디즈니와 달리: 건축과 상상’ 전시를 위해 박물관이 GS&P사와 협업하여 만들었다.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가상현실, 증강현실과 같은 실감미디어를 통해 지각적 체험의 폭을 넓히려는 시도가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달리의 꿈>은 환상이나 꿈 속의 무의식적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달리의 작품 세계와 가상현실기술의 효과적 시너지를 보여준 사례로 손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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