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20월드컵 한국-세네갈 8강전을 전반전만 생중계로 봤다. 새벽에 눈 비비며 경기를 지켜보다 까무룩 잠들고 말았다. 이날 최고의 패배자는 세네갈이 아니라 생중계를 보다 중간에 잔 사람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다음날 뒤늦게, 연장전에 승부차기까지 이어진 명승부를 보고 나 자신이 ‘최고의 패배자’임을 인정했다.

 재방송을 보던 중,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흡인력과는 별개로 ‘결말’을 알고 보는 경기에 대해 묘한 느낌이 들었다.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은 탁자 밑 폭탄을 예로 들어 서프라이즈(surprise)와 서스펜스(suspense)를 구분한 바 있다. 관객에게 폭탄의 존재를 미리 보여준다면 관객은 폭탄이 언제 터질지 마음을 조이며 지켜보게 된다. 반면, 폭탄의 존재를 감춰둔다면 폭탄이 터질 때 관객은 놀라움과 충격에 휩싸일 것이다. 결과를 알고 본 8강전은, 이를테면 서프라이즈보다는 서스펜스에 가까운 셈이다.

 그러나, 그 ‘묘한 느낌’의 정체는 서스펜스 너머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측 선수들이 재방송 시점엔 이미 정해져버린 ‘미래’를 모른 채 혈투를 벌이는 모습은 싱싱하고 아름다웠다. 동시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간의 한계가 뼈아팠다. 연장전 종료 직전 동점골을 넣고 백텀블링을 하는 세네갈 선수나 승부차기 초반에 실축하고 맥빠진 한국 선수나 보는 사람의 마음 한구석을 짠하게 만들기는 매한가지였다. 앞일을 알고 있는 예언자적 시점에서 경기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3시 경,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 모습

<폼페이의 어느 하루(A Day in Pompeii)>(2019 예정) 역시 ‘결말’을 알고 겪는 VR 체험이다. 제목의 ‘어느 하루’가 어느 하루일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로마도시 폼페이는 하루아침에 화산재에 묻혔다. 화산 폭발이 가져온 비극은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제목의 그림, 소설, 영화 등으로 형상화되기도 했다.

 <폼페이의 어느 하루>는 그 운명의 날, 이용자를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이층 발코니에 데려다놓는다. 아침 8시, 아직 하늘은 맑고 새가 울고 사람들은 여느 때처럼 평온한 일상을 꾸리고 있다. 오후 1시, 화산의 굉음과 연기가 심해지고 땅이 흔들린다. 오후 3시, 화산재가 쌓이기 시작하고 사람과 가축의 울부짖음이 들린다. 이용자는 몇 시간씩 시차를 두고 폼페이가 화산 폭발의 재앙에 속수무책으로 휩싸이는 과정을 목격하게 된다.

 폼페이가 18세기 중반, 발굴이 본격화되기 전까지 사실상 잊혀진 도시였으며, 너무나 갑자기 화산재에 묻혔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당대의 생활상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의 제작진은 폭발 당시 폼페이의 모습과 생활 양식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복원하려 했다고 밝혔다. 현재 폐허로 남은 폼페이는 여행객들의 발길로 붐비는 대표적 관광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현실의 폼페이 방문과 차별화되는 강점은 이용자를 ‘그날’의 폼페이로 데려다 놓는다는 데 있다. 한국의 이용자로서는 축지법을 통한 공간여행뿐 아니라 과거로의 시간여행까지 동시에 경험하는 셈이 된다.

 문화재의 디지털 복원을 위해 VR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에 더해, 디지털로 복원된 유산과 스토리텔링의 결합에 대한 논의도 이뤄지고 있다. 과거의 문화유산이 품고 있는, 누구나 ‘결말’을 아는 이야기에 이용자를 어떻게 초대해야 할까? <폼페이의 어느 하루>에서 보통의 아침풍경이 주는 정서적 울림은 비극적 결말을 미리 알고 있는 데에서 온다. 역사적 사실이 스포일러가 아니라 상상력을 촉발하는 계기로 작동하는 방식을 고민해야 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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