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易地思之)’는 상대편의 ‘처지(處地)’에서 생각해본다는 의미다. 처지와 함께 많이 쓰이는 ‘입장(立場)’이라는 단어는 일본어 투 생활용어로서 국립국어원에서 ‘처지’로 순화하기를 권하고 있다. 위 표현들은 공통적으로 ‘지(地)’, ‘처(處)’, ‘장(場)’과 같이 장소를 의미하는 말을 포함한다. 영어에서는 역지사지에 해당하는 말로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는다(be in another’s shoes)’는 어구가 있다. 타인의 처지, 즉 타인이 발 딛고 선 곳을 ‘신발’이라는 환유적 수사로 표현한 것이니 이 역시 장소의 의미를 함축하는 셈이다.

가상현실의 속성인 ‘원격현전’은 이용자를 다른 장소로 데려다 놓는 것이다. VR 이용자는 자신이 몸이 물리적으로 속해 있는 환경보다 VR 기기를 통해 매개된 환경에서 더욱 실재감을 느낀다. 기존 스크린 기반 매체의 관객이 프레임 너머의 세계를 엿보는 형태였다면 VR 이용자는 프레임 너머의 세계로 들어간다. VR 다큐멘터리인 <시드라 위의 구름(Clouds Over Sidra)>(2015)은 이용자를 요르단에 위치한 시리아 난민캠프에 데려다 놓는 경우다. 21세기의 축지법은 VR을 통해 실현된다.

<시드라 위의 구름>은 VR 제작사인 버스(Vrse)사가 UN과 합작하여 만든 작품이다. 시드라는 사막을 건너 난민캠프로 온 지 일년 반이 된 열두 살 소녀다. 위 이미지는 세간살이가 단촐한 난민캠프의 가건물 방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드라의 모습이다. 뒤이어 학교, 빵집, PC방 등 난민캠프의 일상적 공간이 시드라의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펼쳐진다. 시드라는 하늘의 구름 역시 시리아에서 흘러왔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며, 언젠가는 구름도, 자신도, 고향으로 돌아갈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이 작품을 제작한 크리스 밀크(Chris Milk)는 가상현실이 ‘궁극의 공감장치(the ultimate empathy machine)’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용자가 가상현실 속 인물들과 더불어 같은 공간에 실재한다고 느끼므로 공감의 정도가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영화 관객과 달리 이용자는 시드라와 ‘같은 바닥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다. 이용자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난민캠프에서도 공을 차고 공부를 하고 빵을 굽는 사람들의 ‘신발을 신고’ 그곳에 머문다. 밀크는 VR이 “다른 어떤 매체와도 비할 바 없이 인간과 인간을 깊은 유대감으로 이어줄 수 있다는 데에 진정한 위력이 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이러한 VR 콘텐츠를 체험하는 것은 기부 확률을 두 배로 높이고 평균 기부액 역시 10% 증가시킨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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