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론가인 루이스 자네티(Louis Giannetti)는 영화에서 1인칭 시점의 카메라를 관철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관객이 주인공의 모습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주인공이 사람과 사건에 반응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주인공을 알아갈 기회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40여년이 지나 자네티의 주장을 반박하는 영화 <하드코어 헨리(Hardcore Henry)>(2015)가 나온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헨리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 작품이다. 캐릭터와 플레이어의 시점이 일치하는 1인칭 슈팅 게임(FPS, First Person Shooting)에서와 마찬가지로, 관객은 주인공인 헨리가 보는 대로 보고 듣는 대로 듣는다. 이 작품에는 주인공의 얼굴과 목소리가 드러나지 않으므로, 열 명 남짓한 배우 내지 스턴트맨이 번갈아 카메라를 몸에 장착하고 주인공을 연기했다.

이러한 영화의 출현은 하위문화에 머물렀던 게임이 문화 산업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추세와 무관하지 않다. 게임의 문법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1인칭 슈팅 게임의 시점이 생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관객의 눈은 카메라의 눈, 더 나아가 카메라의 눈이 대변하는 주인공의 눈과 중첩되어 주인공의 체험을 따라가게 된다. 일리야 나이슐러(Ilya Naishuller) 감독은 “관객들이 안전한 거리에서 감상하는 것이 아닌, 영화 속 주인공과 한 몸처럼 짜릿하게 경험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고 밝혔다.

<하드코어 헨리>에 대해 길게 언급한 이유는 이 영화가 개봉 당시 VR 업계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위 영화의 관객이 ‘주인공과 한 몸’이 되는 방식은 VR 콘텐츠 중 사전렌더링 방식의 360도 영상에서 이용자가 가상공간 속 등장인물에 ‘신체이입’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1인칭 시점으로 인식되는 가상적 몸은 360도 가상공간에서 이용자의 몸을 대체하는 시각적 분신, 즉 아바타로 기능하게 된다.

소주 브랜드인 ‘좋은데이’의 <박보영 360 VR> 광고 2편은 남성 소비층을 겨냥한 아바타의 모습을 1인칭 시점으로 보여준 사례다. 이용자는 야외 텐트에서 박보영과 마주앉아 술잔을 부딪치게 된다. 이 광고는 사전렌더링 방식으로 제작되었으므로 이용자의 행동이 가상세계의 사건에 영향력을 끼치지는 못한다. 그러나 박보영 옆에 보이는 다리나 술잔을 든 손은 이용자의 현실적 몸을 대체하는 아바타로서 원격현전의 느낌을 강화한다.

영화 이론가 크리스티앙 메츠(Christian Metz)에 따르면, 영화는 인지적 정보가 풍요로우면서도 동시에 비현실적이라는 점에서 거울과 유사하지만, 거울과 달리 단 한 가지, 관객의 몸은 비출 수 없다. 영화에 투영되지 못하는 관객의 몸을 VR 콘텐츠에서는 1인칭 시점의 아바타로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다. 즉, 이용자는 VR 콘텐츠를 통해 다른 사람의 몸, 혹은 사물로 ‘변신’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인종, 성, 나이 등 이용자의 신체조건에 따라 아바타 이미지의 효과가 어떻게 발휘되는지는 추후 연구가 더 필요한 주제이다. 이를테면 위 광고와 같이 타겟 이용자의 성별이 분명한 경우, 여성 이용자와 남성 이용자가 아바타를 받아들이는 심리와 태도는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변신을 통해 스스로의 몸을 상대화시키는 경험이 이질적 존재에 대한 이용자의 공감을 끌어낼 가능성은 VR 스토리텔링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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