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에서 구글 스폿라이트스토리즈(Spotlight Stories) 앱을 다운받아 상호작용이 가능한 버전을 체험할 수 있다.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Rosencrantz and Guildenstern Are Dead)>(1990)라는 영화가 있다. 제목을 기억하기 난망한 이 작품은 희곡 원작자인 톰 스토파드(Tom Stoppard)가 직접 각색하고 감독했다.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햄릿의 친구로 잠깐 등장하는데, 스토파드 감독의 영화에서는 엄연히 주인공의 자리를 꿰찼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야기에 수많은 조연 캐릭터가 등장하지만, 그 캐릭터 각각이 자신의 인생에서는 주인공이 아닐 리 없다.
좋은 영화라면 조연 캐릭터라도 나름의 역사와 의지를 가진 두께감 있는 인물로 형상화된다. 좋은 작가들은 조연 캐릭터의 모든 것을 다 알려주지는 않더라도 그 캐릭터가 나름의 삶을 가진 온전한 존재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나 영화가 편집된 숏의 나열에 따라 선형적 스토리텔링을 구현한다는 속성상, 주인공과 조연 캐릭터의 위계와 비중은 고정된다. 반면, VR 콘텐츠 중 실시간렌더링 방식의 콘텐츠에서 조연 캐릭터는 이용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 존재감과 의미효과가 유동적으로 구현된다.
<비오거나 쨍하거나(Rain or Shine)>(2016)는 펠릭스 매시(Felix Massie) 감독이 구글 스폿라이트 스토리즈(Spotlight Stories)와 합작하여 만든 VR 애니메이션이다. 어느 볕 좋은 날, 썬글라스를 선물받은 꼬마를 심술궂은 비구름이 쫓아다니며 벌어지는 소동을 경쾌하게 그렸다. 이 작품에는 우체부, 낮술 마시는 남녀, 길고양이, 아이스크림 아저씨 등 다양한 조연이 등장한다. 영화의 경우, 관객이 어떤 배우에게 마음을 빼앗기더라도 프레임 바깥으로 나간 배우를 눈길로 쫓을 길이 없다. 그러나 실시간렌더링 방식으로 제작된 이 작품에서 곳곳에 등장하는 조연들은 이용자의 눈길과 관심에 부응하여 반응한다.
위 그림은 꼬마에게 썬글라스를 배달한 우체부의 모습이다. 이용자가 꼬마 모녀에게만 눈길을 준다면 우체부가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용자가 우체부의 쾌활한 걸음걸이를 계속 주시하면, 우체부는 모퉁이를 넘어가는 순간까지 특유의 걸음걸이를 성실하게 ‘연기’한다. 오른쪽 그림은 동네 술집에서 사이좋게 낮술을 마시는 남녀의 모습이다. 이용자의 눈길이 꼬마를 뒤쫓다 이들에게 되돌아가면, 빈 술잔이 늘어있고 두 남녀는 새 술잔을 비우는 중이다. 즉, 이용자가 낮술에 관심이 없다면 남녀의 음주량은 줄어든다. 메이킹 동영상에서 감독은 “이용자가 마치 핸드폰 안에 작은 극단을 갖고 있어서 배우들이 무대 바깥에서도 연기하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물론 실시간 렌더링 방식의 VR 콘텐츠에서도 조연의 입지는 상호작용이 설계된 만큼만 주어진다. 그러나 이용자는 자신의 관심도에 따라 각 조연 캐릭터들의 ‘조합’과 ‘비중’을 어느 정도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즉, 조연 캐릭터가 서사 전개를 위한 기능으로 환원되지 않고, 이용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나름의 존재감을 구축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기는 셈이다. 조연 캐릭터가 주어진 스토리의 세계 내에서 온전해지는 만큼, 그 스토리의 세계는 현실에 더 가까워진다. 현실에서 한사람 한사람이 자신의 삶에서는 모두 주인공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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