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이야기라도 입담 좋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더 재미나게 느껴진다. 이들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요소 중 어떤 정보를 얼마나 감출지, 언제 흘릴지 선택하는 데에 탁월한 감각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 서사정보의 노출과 은닉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핵심적 전략이다. 스토리텔링이 창작자와 수용자 사이에 벌어지는 ‘밀당’의 다른 표현인 이유이다.

 영화는 숏사이즈나 시공간의 편집을 통해 서사정보를 조율하는 것이 가능하다. 반면, 360도 공간을 다루는 VR 콘텐츠는 숏 사이즈나 편집의 운용이 영화에 비해 대폭 제한된다. 이를테면, 영화와 같이 클로즈업을 이용해 특정 서사정보를 부각시키기 어렵다. 게다가, 공간성이 강화되는 특성상, 숏이 자주 바뀌면 몰입감이 깨지기 쉽고 이용자가 멀미를 느낄 수도 있다. 결정적으로, 영화에서 관객의 시야가 프레임 안에 갇히는 것과 달리, VR 이용자는 스토리텔러의 ‘독재’에서 벗어나 360도 가상공간에서 시선의 자유를 누린다. 따라서, VR 창작자는 서사정보의 은닉과 노출을 둘러싼 이용자와의 밀당에서 영화에 비해 현저하게 불리한 위치에 있다. 애니메이션 <로스트(Lost)>(2015)는 이러한 난점을 역이용하여, VR 이용자가 서사정보를 자율적으로 탐색하도록 유도한 경우이다.

 오큘러스스토리스튜디오(Oculus Story Studio)의 데뷔작인 <로스트>는 달빛이 교교한 숲을 배경으로 길을 잃은 로봇 손과 로봇 몸체의 상봉을 다루었다. <로스트>는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탐색의 모티프를 네 단계로 펼쳐놓는다. 우선, 어두운 숲속으로 들어간 이용자는 삐-삐 신호음의 출처(로봇 손)를 찾아 두리번거리게 된다. 로봇 손은 로봇 몸체를 찾아 숲속을 배회하는 중이다. 로봇 몸체 역시 잃어버린 손을 찾아 서치라이트를 켜고 숲을 뒤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손을 찾은 로봇은 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이용자를 발견한다.

 사슈카 언셀드(Saschka Unseld) 감독은 제작 과정에서 이용자의 시선을 통제하는 문제가 중요한 화두였음을 밝힌다. 기존 영화가 각 숏의 시점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었던 것처럼, VR 콘텐츠에서도 관객의 시선을 장악할 방안을 강구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운드나 세트 디자인 등을 통해 시선을 유도하려는 장치가 노골적일수록 스토리텔링이 억지스럽고 인공적으로 느껴짐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제작진은 시선의 자유를 VR 콘텐츠 고유의 특성으로 인정하고 관객이 스스로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기(The Letting-­Go)”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로스트>에서 조명, 사운드, 움직임 등 시선을 조율하는 각종 장치들이 용의주도하게 사용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다만, 언셀드 감독은 이용자가 나름의 페이스대로 주위를 탐색할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앞서 뮤직비디오 <어항>을 공간적 스토리 밀도와 관련해서 소개한 바 있다. 공간적 스토리 밀도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숨은그림찾기와 같아서 더 많이 찾을수록 재미있을지언정 다 못 찾아도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지장은 없다. 반면, <로스트>에서 네 가지 탐색의 모티프는 이야기의 전개에 필수적인 서사정보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이용자의 움직임을 추적하여 영상정보에 반영하는 실시간렌더링 방식을 취하는 만큼, 이용자의 시선에 따라 서사 단계를 일부 지연시키는 전략을 썼다. <로스트>의 도입부에서 로봇 손의 등장 자체는 예정되어 있지만 로봇 손의 등장 시점은 이용자가 로봇 손 쪽에 시선을 둘 때이다. 이용자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느라 계속 ‘한눈판다면’ 로봇 손의 등장은 그만큼 늦춰진다.

 이용자는 프레임의 제한에서 벗어나 달빛이 내려앉은 숲속을 둘러보며, 로봇 손과 로봇 몸체의 상봉을 둘러싼 다층적 탐색 과정에 동참하게 된다. 제한된 시야각으로 인해 360도 가상공간을 동시에 볼 수 없다는 생물학적 한계가 역으로 이용자의 참여와 흥미를 끌어내는 계기로 작용하는 셈이다. <로스트>는 탐색의 모티프에 VR 고유의 속성인 시선의 자유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이용자의 몰입도를 끌어올린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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