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를 쓰고나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은 진정한 평화주의자가 되길 희망하는 내가 온 정성을 다해 조사하며 기록해나간 전쟁역사이다.”‘ “조사하고 기록해나간다”라는 말에서 작가의 글쓰기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시오노 나나미가 자다가 벌떡 일어날 일이 생겼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는 2017년 7월 14일, 스위스 로잔연방공과대와 이탈리아 카포스카리 베네치아대가 인공지능(AI)의 머신러닝(기계학습) 기술을 활용해 중세 베네치아 공화국을 사실상 디지털로 구현하는 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출처:YTN science, 2017.6.22)내용인즉슨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을 활용해 고대 베네치아 사람들의 행정 문서나 의료 기록, 부동산·금융거래 문서, 지도, 건축 설계도 등을 분석해서 당시 거리 모습은 물론, 사람들이 주로 누구와 알고 교류했는지 분석해서 당시의 사회적 연결망을 구현했다는 것이다. 베네치아를 연구 대상으로 삼은 것은 베네치아가 중세부터 근대까지 1000년 가까이 유럽 무역의 중심지로 활약하며 기록한 방대한 문헌이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5세기 말 본격적으로 도시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베네치아는 10세기부터 지중해 무역 중심지로 떠올랐다. 1000년 가까이 유럽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하면서 축적된 행정 기록물과 금융거래 문서는 수백만권에 이른다고 한다. 즉 데이터가 많은 것이다.
베네치아 타임머신 프로젝트. 어떻게 구현한 것일까? 살펴보면 각종 첨단 복원기술이 동원됐다. 가장 먼저 베네치아 국가기록물 보관소에 있는 지도와 논문, 원고, 낱장 악보, 각종 계약서 등 수백만건 문헌을 디지털 파일로 스캔하는 작업에서 출발했다. 자동으로 책장을 넘기는 로봇팔과 2m크기의 대형 회전스캐너를 제작해 시간당 최대 수만장의 문헌 자료를 고해상도 디지털 이미지로 바꿔 연구진의 컴퓨터 서버에 전송하는 작업을 했다. 직접 책장을 넘길 경우 손상이 우려되는 고서(古書)들은 컴퓨터 단층촬영(CT)기술을 활용해 통째로 스캔했다. 병원검사에서 CT가 사람몸통의 특정 부분을 횡단면으로 잘라 보여주듯이 다양한 각도에서 촬영한 CT영상으로 책의 단면, 즉 책장 하나하나를 복원했다. 그리고 스캔한 문서들을 디지털 검색이 가능한 텍스트 형태로 바꿔나갔다.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 손으로 쓴 옛 문헌에는 흘려쓴 필기체나 시대에 따라 달라진 표기법 때문에 같은 단어나 사람 이름도 조금씩 다르게 표기했다. 여기에 AI의 기계학습 방법을 적용했다. 손으로 작성된 글자들의 형태는 물론 문장 속 단어 위치와 빈도 등을 기억하도록 한 뒤 변형 가능한 모양이나 형태를 스스로 학습해 자동으로 인식하도록 한 것이다. 이를 다큐멘터리로 보듯이 상세한 영상으로 재구성했다. 여러사람이 서로 친구맺기를 하며 연결되는 현재의 페이스북처럼 당시 문서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근거로 베네치아에서 개개인이 서로 어떻게 사회적으로 연결됐는지를 파악한 것이다.
이 놀라운 베네치아 프로젝트의 완성은 인문학과 디지털 기술의 결합인 디지털인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과거를 소환한 ‘디지털 가상현실’ 이라고 볼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몇 가지 인문학적 상상을 하게 한다. 가령 전문인력과 자본이 협조만 된다면 디지털 타임머신을 타고 가고 싶은 지역이나 공간(건축물 박물관 도서관)을 집에서도 볼 수 있는 시대가 열릴 것 같다는 것이다. 동시에 학교수업에서도 교육용으로 활용하면 꽤나 효율적이고 재미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이렇다.
신라시대 승려 혜초(慧超, 704∼787)는 고대 인도의 오천축국(五天竺國)을 답사한 뒤 727년『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썼다. 그 속에서 토번(吐蕃), 그러니까 오늘날의 티베트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이보다 동쪽에 있는 토번국(吐蕃國)은 순전히 얼어붙은 산, 눈 덮인 산과 계곡 사이에 있는데, (사람들은) 모직물로 만든 이동식 천막을 치고 산다. 성곽이나 가옥은 없으며, 처소는 돌궐(突厥)과 비슷하며, 물과 풀을 따라 이동한다. 왕은 한곳에 거처하기는 하지만 성(城)도 없이 모직물로 만든 이동식 천막에만 의지하는데, (이것을) 재산으로 여긴다. 토지에서는 양, 말, 묘우(猫牛), 모포, 베 등이 나온다. 의복은 털옷과 베옷, 가죽 외투인데, 여자들도 그렇다. 다른 나라와 달리 기후가 매우 차다. 집에서는 늘 보릿가루 음식을 먹고 빵과 밥은 조금 먹는다. 국왕과 백성들은 모두 불법을 알지 못하고 절이 없다. 나라 사람들은 모두 땅을 뚫어서 구덩이를 만들어 누워서 침상이 없다. 사람들은 매우 까맣고 흰 사람은 아주 드물다. 언어는 다른 여러 나라와 같지 않다. 대부분 이(虱)를 잡는 것을 좋아하며, 털옷과 베옷을 입기 때문에 이(虱)가 매우 많다. (이를) 잡자마자 입 안에 던져 넣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당시 혜초가 남긴 기록을 살펴보면, 고대 티베트인들이 처한 생존환경과 삶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는데 이를 디지털 가상현실로 복원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베네치아 프로젝트와 같은 방법으로 과거의 티베트를 오늘날로 소환한다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막대한 자본과 전문인력 시간과 디지털 복원기술이 필요하다.
한편 다른 생각이 들기도한다. 디지털 가상현실로 복원한다해도 즉 당시의 환경, 기후, 공간, 음식, 관계, 날씨, 동물들을 볼 수 있다해도 ‘이것만은 좀 그럴껄?’ 하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 있다. 바로 ‘냄새’와 ‘소리’다. 천년전 공간과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동식물 포함)들이 발산했던 소리와 냄새도 구현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다. 생명체가 간직하고 있는 소리와 냄새는 중요하다. 이것은 인간의 감정과 공감(共感)의 형성에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경험’과 ‘기억’이라는 개인적 혹은 집단적 사건을 통해서 형성되고 누적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경험없는 감정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의미에 과거의 공간과 사람들의 행적을 디지털로 소환하는 작업과 인간이 느끼는 감정-기억-경험-실감-공감의 문제는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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