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 시대의 독일 관료였다. 유대인들을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데 실무를 담당했다. 유대인 이송 문제를 실질적으로 책임지던 자였다. 나치 독일의 패망 이후 전범으로 수배되었으나 아르헨티나에 숨어 있다가 이스라엘의 비밀첩보부 ‘모사드’에 의해 붙잡혀 예루살렘 재판정에 섰다. 사람들에게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인종 청소를 자행하는 데 주도적으로 간여했던 악의 화신이자 괴수로 여겨졌다.
그러나 독일 출신 유대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직접 지켜보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절대악’이어야만 했던 아이히만이 결코 악마의 화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괴물이어야 했던 아이히만의 모습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특별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히만은 그 어떤 죄의식도 느끼지 않은 채 재판 내내 자신은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것뿐이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줄곧 변명했다.
이 악행은 악행자의 어떤 특정한 약점이나 병리학적 측면, 또는 이데올로기적 확신으로는 그 근원을 따질 수 없는 것으로 그 악행자의 유일한 인격적 특징은 아마도 특별한 정도의 천박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바로 이 지점에서 20세기 정치사상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로 평가 받는,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이 탄생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악인이거나 병리적 살인마가 아니었다. ‘홀로코스트’라고 불리는 엄청난 살상에 간여했던 그가, 결코 도착적이거나 가학적이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기계적 명령 수행자로 자신을 변명했다. 상황에 대한 판단이나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결여된 인물이었다. 자신이 저지르는 일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 sheer thoughtlessness’였다.
아이히만이 저지른 끔찍한 인류적 범죄는 바로 아렌트가 말한 ‘순전한 무사유’의 결과였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단죄하는 법정에서도, 심지어는 사형장에 끌려 가면서까지도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생각지 않았다. ‘사유의 불능성’이었던 셈이다.
아렌트는 예루살렘에서 경험한 아이히만의 재판을 철학적 관점으로 풀어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을 펴낸다. 아렌트의 이 도전적인 저작은 당시 세간의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아렌트는 이 글로 인해 유대인 사회뿐만 아니라 가까운 지인들에게까지 거센 비난과 비판에 직면한다. 마치 아렌트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아이히만)에게는 관대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상을 겪었던 피해자(유대인)들에게는 가혹한 입장을 취한 것처럼 오도되었다. 유대민족에 대한 배신으로까지 여겨졌다. 하지만 아렌트는 자신의 입장을 돌이키거나, 가혹한 비판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아이히만에 대한 통찰이 인류적 범죄를 옹호한 것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이 저작을 통해 오히려 ‘홀로코스트’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전체주의’라는 악의 근원을 밝힌 것이다.
기술사회와 인간의 영역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다루고 있는 세계는 지금으로부터 반 세기도 더 너머에 있다. 그런데 요즘 들어 한나 아렌트와 아이히만이 자꾸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무래도 인공지능, 로봇과 같은 급격하게 발전하는 기술이 열어 보이는 세상에 대한 무거운 그림자 때문인 듯하다.
여기에는 좀 더 자세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얼마 전 ‘알파고’ 현상이 우리 사회를 한 바탕 휩쓸고 지나간 후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에 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생각한 분야까지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해 가는 현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공포와 불안을 피력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발전의 속도가 비교적 완만하게 이루어지던 시대에는 인간의 편의를 위해 기술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근래의 기술 발전은 인간의 예측가능성을 훨씬 뛰어넘어 우리의 이러한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고 있다. 마치 재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땅덩어리가 순식간에 허물어지면서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쫓기는 형국이다. 있는 힘을 다해 뛰어보지만 따라오는 속도를 이겨낼 수 없다.
문제는 ‘시간’이다. 지금껏 인간은 시간을 자신의 통제 아래에 두고 관장해 왔다. 기술의 발전이 만들어온 변화에 비교적 잘 적응해 왔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희박해보인다. 기술의 급격한 발전은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이 적응해 온 시간의 관념을 이미 초월하고 있다. 기술의 변화 속도에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이 벌써 속출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추세라면 멀지 않은 시간 내로 기술이 인간을 앞지르는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미래학자이자 발명가인 레이 커즈와일이 말한 특이점 시대의 도래는 대체로 기정사실화되어 가고 있다. ‘특이점’이란, 인간의 사고능력으로는 예상하기 힘들 정도로 획기적으로 발달된 기술이 구현되어, 모든 면에서 기술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순간을 의미한다. 인간이 ‘시간’이라는 관점에서 기술을 통제하던 시대는 이제 끝이 났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세상이 된 것이다.
인공지능이 잠식해 가는 인간의 영역은 앞으로 훨씬 더 급격히 늘어날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정반대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이제 자신이 점유하고 있었던 영토에서 점점 더 밀려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흔히 기술이 넘볼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을 찾아나가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마저도 순조롭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런 의미에서 설정해 놓은 인간의 직관, 사고, 창의, 감정 등과 같은 영역조차 인공지능의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다.
지금까지는 ‘생각할 수 있음’이 인간을 정의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었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제 재정의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기억을 재생한다는 의미에서의 ‘생각’이라면, 기계가 인간보다 이미 훨씬 뛰어나다. 데이터를 수집, 파악하고 의미 있는 자료를 만들어내는 분석적 능력까지도 이제 인간이 기계를 따라잡기란 불가능하다.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복잡한 지식 기반을 이미 대체해 나가고 있다. 사람들이 난공불락의 성이라고 막연하게 감싸고 있었던, 창의의 영역, 혹은 예술의 영역에까지 인공지능은 자신의 활동 범위를 넓히고 있다. 노동이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중대한 요소였지만 기술 발전이 만들어내는 ‘노동의 종말’은 지금 쓰나미처럼 다가오고 있다. 지금까지의 산업사회가 ‘노동의 통제’ 시대였다면, 앞으로의 사회는 ‘노동의 배제’ 시대가 될 것이다. 이제 인간을 규정하고 조건 짓는 개념은 확연히 새롭게 쓰여져야 한다.
앞서 살핀 바대로, 사유하는 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할 인간을 대신하여, 거대한 악(나치)의 체제 아래에서 상부의 명령에 의해서만 자신의 행위를 규정하려 든 아이히만은 인간보다는 기계에 가까운 존재라 할 수 있다. 그의 ‘사유하지 않음’의 결과는 참혹했다. 아이히만은 전체주의가 어떻게 개인을 무력화시키고 짓밟았는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존재였다. 아이히만의 ‘순전한 무사유’란, 결국 인간의 가치와 조건에 대한 물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정치적 전체주의를 대신하여 기술전체주의가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가 이 질문을 비켜가기는 어렵다.
(2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기술사회와 인간의 조건②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 ~ 1975)
독일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 1906년 독일 하노버에서 태어났다. 마르부르크 대학에 진학하여 철학, 신학, 그리스어를 공부하던 중 교수로 있던 마르틴 하이데거를 만난다. 이 만남은 두 사람 모두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이데거를 떠나 하이델베르크에 있던 야스퍼스를 찾아가 철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이후 아렌트는 유대인에 대한 박해와 억압이 심해지던 시기에 독일의 시온주의자들을 돕는 일을 하다가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프랑스로 망명하지만,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요행히 수용소를 탈출하게 되고 결국 1941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인류에 대한 거대한 위협으로서의 전체주의의 광기를 파헤친 『전체주의의 기원』(1951)은 그녀에게 정치철학자로서의 입지를 준 첫 번째 주요 저작이 된다. 이후 『인간의 조건』(1958)에서는 인간됨의 참된 가치에 대한 성찰과 사유, 실천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 대한 보고서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여 숱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렌트는 1975년 운명을 다할 때까지 『암흑시대의 인간』(1968), 『폭력론』(1970), 『공화국의 포기』(1972)와 같은 저작을 남기는 등 왕성한 지적 활동을 지속했다. 사후에는 『정신의 삶』(1978), 『칸트 정치철학 강의』(1982) 등이 출간되기도 했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과 세계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20세기의 가장 문제적인 사상가이자 철학자로 평가 받는다. 인간 존재와 정치의 본질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을 전개하여 정치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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