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Basic Income)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모든 사람에게 조건없이 일정한 금액을 지급하자는 기본소득 논의가 최근 들어 전 세계적으로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현실에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제대로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기본소득에 관한 최근의 흐름은 새로운 현상임이 분명합니다. 특히 인공지능을 비롯한 첨단기술의 급격한 발전이 가져오고 있는 디지털 시대의 ‘노동의 종말’과 ‘불평등의 심화’는 기본소득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에 소요에서는 기본소득에 관한 특집 연재를 마련하였습니다.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충분히 있으며,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는 점을 미리 밝힙니다. 기본소득 논의를 통해서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지혜를 모으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편집자)
차례
1부
– 우리에게 ‘조건없는 돈’이 지급된다면?
–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
– 기본소득의 역사
2부
– 기본소득은 왜 필요한가?
–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란
3부
– 디지털 시대의 불평등과 기본소득
♣ 2부
기본소득은 왜 필요한가?
기본소득의 역사를 살펴 본 바와 같이, 기본소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 뿌리가 깊고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져온 제도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기본소득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기본소득의 필요성은 지금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여러 방식으로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논의를 중심으로 살펴 보기로 합니다.
1. 사회적 부의 공유와 나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기본소득의 관점으로 보면, 한 사회의 부는 어느 특정한 사람이나 계층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선 인간의 부가 기본적으로 토지나 자원을 활용하여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어느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 사회 혹은 인류 전체의 자산인 공유재인 것입니다. 인류가 보유한 자연 자원은 사적 소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노동과 결합하여 만들어진다고 해도 그 생산물 혹은 부의 기초는 자원이기 때문에, 모든 사회적 생산물의 일부는 전 사회 구성원이 함께 나눠가질 권리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가면 인류의 생산력 증가는 인류가 보유한 지식, 정보, 문화, 기술의 발전에 의해서 가속화되어 왔는데, 이러한 인류의 지적 자산은 결국 공유재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부를 창출하는 특정한 기술이나 생산수단도 사실은 그 바탕에는 인류의 문화적 자산이 뒷받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경우에도 이 같은 사회적 자산 없이 순수한 차원에서 단독으로 부를 창출해낼 수는 없습니다. 하여 한 사회가 보유한 부는 공동체에 기반을 두고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하며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들은 공유자산에 대한 나눔의 권리, 배당받을 권리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한 사회의 구성원, 즉 모든 시민들의 활동은 사회적으로 쓸모 있고 그 활동이 사회 발전에 어떤 형태로든 기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돌봄노동, 봉사노동, 가사노동, 시민활동 등과 같은 이른바 ‘그림자노동’은 임금으로 환산되어 지급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고 하여 이들의 활동이나 노동이 쓸모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활동이 멈춘다면 한 사회는 제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시민들이 어떤 활동을 하건 그 활동은 그 사회에 어떤 형태로든 기여한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기본소득은 바로 이러한 모든 시민들의 활동에 사회가 지급하는 소득인 셈입니다.
2. 인간다운 삶과 보편적 권리 보장
기본소득은 존재 자체를 위해 필요한 소득입니다. 한 사람이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인간다운 가치를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인간다운 가치를 누리기 위해서는 생존에 필요한 소득이 어떤 형태든지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생존권 혹은 생명권은 인간이 누려야 할 여러 권리 중에서도 가장 앞선다는 의미에서 ‘권리 이전의 권리’라고 합니다. 기본소득은 바로 이러한 생존권을 지키는 데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소득을 의미합니다.
사람들마다 벌어들이는 소득은 다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득조차 얻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지금도 정상적인 사회나 국가에서는 이러한 구성원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도움을 부분적으로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적인 도움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불평등과 빈곤 문제를 원활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이나 조건에서도 인간의 보편적 권리인 생존권은 무조건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기본소득의 가장 중요한 정신이기도 합니다.
다소 이상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기본소득이 시행된다면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 외에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거나 이를 준비하는 시간을 이전보다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강요된 노동이 안겨주는 고통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의 자살률은 OECD 국가 중에서 계속해서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그 원인을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 바탕에는 비정한 경쟁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공통된 진단입니다. 기본소득은 우리 삶에서 언제부턴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자유와 인간다움’의 가치를 지금보다 더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물질의 풍요가 결코 인간의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지만,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물질적 충족은 우리에게 행복의 기본 조건을 마련해줄 수 있습니다.
3. 불평등 심화와 삶의 붕괴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이야기할 때 그 어떤 근거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불평등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롭지만 가장 불평등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하위 50%에 해당하는 35억 명이 지닌 자산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62명이 가진 부보다 적습니다. 세계에서 상위 10% 인구의 소비 수준이 전 세계 소비의 72%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위 10% 인구가 소비하는 비중은 전 세계 소비의 1%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도 예외적이지 않습니다. 한국인 상위 10%가 전체 자산의 66%를 차지하고 있고, 하위 50%는 전체의 2%에 불과한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불평등의 심화는 앞으로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해결되기는 커녕 악화될 것이 분명합니다. 노동에서 비롯되어 대중에게 분배되는 부는 계속해서 줄어들고, 자본에서 비롯되어 소수에게 집중되는 부는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주류 경제학자들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저성장, 혹은 제로성장의 시대는 이미 현실화되고 있으며 약간의 성장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과거처럼 온전히 인간노동을 매개로 한 성장이 아니기 때문에 구성원들에게 소득으로 분배되지 않을 가능성이 더욱 높아집니다. 고용창출과 소득분배로 이어지지 못하는 성장의 열매는 결국 기술과 자본을 독점한 소수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될 경우 자본주의 경제 자체가 근간에서 흔들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이 경제성장에 역효과를 미친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세계경제포럼(다보스 포럼)과 같이 기업이나 자본의 입장을 대변하는 모임에서도 불평등 심화에 대한 해결 모색은 최근 몇년째 가장 주요한 의제가 되고 있습니다.
불평등의 표현으로 1990년대 중반에는 ‘20:80 사회’라 불리던 것이 2010년대에는 ‘1:99 사회’로 명명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0.1:99.9’ 사회로 접어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99.9’에 속하는 대다수 시민들은 ‘0.1’이 독점한 기술과 자본, 그리고 부를 나눠 갖지 못합니다. 기본소득은 이러한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 확실한 제도가 될 수 있습니다. 상상을 초월할 만큼의 부를 갖고 있는 부유한 사람들의 자산을 생존 자체가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매우 간명하고 효율적으로 분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득 격차의 완화, 빈곤 퇴치를 위해 지금도 상당히 많은 비용이 들어가고 있지만 그만큼의 성과를 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금수저-흙수저’로 표현되는, ‘출발선의 불평등’도 기본소득을 시행한다면 상당히 완화할 수 있습니다. 극심한 불평등 사회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증오와 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기본소득은 불평등 구조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사회혼란을 막고 안정적인 부를 창출해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부유한 사람들에게도 장기적으로 충분히 바람직한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4. 자본주의 경제 · 사회 구조의 변화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지속적으로 생산력을 증대시키며 발전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드러냈지만, 이를 보완하는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수정된 자본주의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급격한 기술의 진보가 가져온 산업구조의 변화 등으로 새로운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금융자본과 기술자본을 위시한 글로벌 자본의 힘은 막강해진 반면, 노동과 기존 산업은 급격히 위축되고 있습니다.
급속한 기술의 진보는 생산양식의 변화와 노동시장의 붕괴를 가져왔습니다. IT기술로 대표되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막대한 생산성 증가와 함께 일자리를 구조적으로 줄이고 있습니다. 새로운 산업혁명이라 불릴 정도로 그 변화의 양상은 가히 혁명적입니다. 인공지능, 로봇, 생명과학, 사물인터넷(IoT) 등의 새로운 기술은 인간의 노동이 담당해 왔던 기존의 산업사회의 영역을 자동화된 기계와 기술로 대체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될 경우 일자리를 잃게 되는 것은 물론, 정규직 노동을 현격하게 감소시키는 등 노동의 유연화가 필연적으로 진행될 것이며, 집단적 생산활동을 축소시켜 개별적 노동으로 탈바꿈하게 하는 등 기존의 생산양식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러한 생산양식의 변화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는 사회 구성원은 결국 소수에 한정될 수밖에 없으며 대다수 사람들은 기술이 대체해 나가는 노동에서 배제되어 갈 것입니다. 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이 창출되는 일자리 수는 그로 인해 사라지는 일자리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합니다.
세계화의 거센 물결은 한 동안 제 3세계의 저임금 노동구조에 힘입어 글로벌 거대 자본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세계화의 양상이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전통적인 산업 구조를 대신한 금융자본과 기술자본이 초거대자본을 형성하면서 기존 산업체계를 완전히 재편하고 있습니다. 저임금 노동을 찾아 제 3세계로 흩어졌던 자본이 자국의 자동화된 시스템으로 회귀하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본국의 고용을 창출하는 것도 아닙니다. 값싼 노동력보다 더 값싼 로봇이나 인공지능을 통한 자동화된 생산과 유통이 가파르게 확산되면서 기존의 생산과 서비스 부문의 노동을 대체해 나가고 있습니다. 시간제 혹은 비정규직 일자리가 정규직 일자리를 잠식하면서 불안정 고용의 확대와 이로 인한 노동의 양극화는 사회의 근간을 흔들 정도로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평생 직장 신화나 완전고용의 시대는 이미 끝난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양극화는 비단 자본과 노동 사이뿐만 아니라 노동과 노동 간에도 그 균열을 깊게 만들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로봇, 사물인터넷 등의 자동화 시스템 확산으로 산업 현장에 사람이 없는 풍경
이러한 사회·경제 구조의 급격한 변화는 필연적으로 이 변화의 길에서 낙오되는 사람들을 양산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낙오되는 사람들의 규모가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기술과 자본이 만들어낸 사회적 부는 더없이 거대해졌지만, 그 부의 분배는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며 가장 확실한 분배의 경로였던 ‘노동’의 위축, 감소, 혹은 종말은 다수의 빈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매우 강력하게 체감하게 됩니다. 기본소득은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경제 구조의 급격한 변화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온전한 삶을 누릴 권리를 국가나 사회가 보장해주는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복지제도의 위기와 한계
복지제도는 근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완화하고 보완하는 제도로 역할을 해 왔습니다. 그간의 역사에서 복지제도는 자본주의 불평등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해 왔고, 사회의 안정적 발전에 기여해 왔습니다. 고른 분배와 격차의 해소는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신념과 상호협력을 기반으로, 노동-자본-국가 간의 합의와 타협을 이루어낸 결과였습니다. 물론 복지제도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통용될 수 있는 제도는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복지제도를 제대로 시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국가나 사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복지제도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이에 필요한 재원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합의를 통해 제도를 시행해 나갈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지제도는 그간의 과정에서 한계와 위기를 지속적으로 드러내 왔습니다. 앞서 살핀 바대로 사회·경제적 구조의 변화는 불안전 고용과 노동의 감소를 확대해 왔습니다. 복지국가가 추구했던 합의와 타협에 기반한 사회질서는 노동-자본의 관계가 약화되는 것에 발맞추어 점차 붕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복지국가의 모델은 노동의 활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복지제도는 노동이 가능한 사람이나 집단에게는 노동과 기여를 전제로 한 복지혜택을 부여하고, 노동이 불가능한 사람이나 집단에게는 노동의 가능성을 조건으로 복지의 수혜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운용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른 노동의 감소와 유연화는 완전고용의 목표에 기반을 둔 복지국가의 모델에 균열을 일으켰습니다. 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전제로 이루어져 왔던 복지국가 모델은, ‘경제성장의 신화’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위기에 처하자 크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복지제도는 대체로 선별적 복지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복지 수혜 대상자를 선별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자격심사가 필요합니다. 우리사회가 실행하고 있는 실업수당만 해도 일시적으로 혜택을 주기는 하지만, 지속적인 ‘구직 활동’과 같은 일정한 조건을 충당해야 합니다. 이러한 선별 복지제도는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이 비교적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시기에는 그럭저럭 돌아가는 시스템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일자리조차 없어지거나 새로이 만들어지는 일자리가 대부분 적정한 소득을 보장하기 힘든 일자리일 경우에는, 이 제도의 한계는 명백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 결과 일정한 자격심사에서 탈락한 사람들이 늘면서 ‘복지사각지대’가 확대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생활고를 못 이겨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하는 사람들의 가슴 아픈 소식이 끊이지 않는 것은 바로 이 같은 ‘복지사각지대’, 즉 선별적 복지제도의 한계에서도 그 일단의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영국 사회의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시민들의 고통을 그린 켄 로치 감독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복지제도의 문제는 대상자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안겨 주는 ‘낙인찍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 노력이나 의지의 부족이 아닌데도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복지대상자들을 사회의 한 켠으로 몰아세웁니다. 사회빈곤층에 대한 이러한 ‘낙인찍기’의 부작용은 이들의 자립 가능성을 현저하게 떨어뜨립니다. 가난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가난을 증명하지 않을 권리’는 보장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선별적 복지제도는 자격심사의 기준 때문에 여러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기초생활수급자인 아버지가 자신의 수급권 탈락을 우려하여 자식에게 직장을 그만두게 하는 사례와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일정한 노동을 통한 수입이 생기면 기존에 받고 있었던 복지 지원을 끊어버리는 방식의 현행 시스템은 빈곤층을 계속해서 빈곤층으로 고착하게 하는 부작용을 낳게 합니다. 이들에게 주로 주어지는 저임금·비정규직 노동은, 복지지원을 선택할 것인가, 노동을 선택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게 만듭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복지의 대상자와 비대상자를 가르는 자격심사는 결국 가난한 사람들을 영속적으로 ‘빈곤의 덫’에 가두게 합니다.
기본소득은 이러한 복지제도의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하는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기본소득에는 자격심사가 필요 없습니다. 지원이 필요한 사람이 까다로운 절차나 기준에 의해 배제될 염려가 없습니다. 담당공무원들도 복지 대상자의 자격을 감시하는 데 행정력을 쏟아 붓는 대신에 시민의 진정한 복지 서비스를 개선하는 데 시간을 투자할 수 있습니다. 복지제도의 지원 자격과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사람들 중에도 삶의 절박한 이유로 반드시 지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현행 복지제도에는 이른바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구제할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몇 년 전,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송파 세 모녀 자살’은 이러한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의 비극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조건없는 소득’을 지급하자는 기본소득 제도의 정신은 삶의 안전망뿐만 아니라 이들이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동등하게 인정받고 있다는 연대감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결국 기본소득 제도는 모든 시민들에게 복지의 혜택이 돌아가게 하자는 보편적 복지제도의 이상을 오히려 가장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란
그렇다면 기본소득을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논의는 없을까요? 이에 대해 미리 답을 한다면 기본소득에 관한 반론이나 비판은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고 기본소득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최근에도 논란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본소득 논의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그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실현 가능성 없는’, ‘허무맹랑한’ 아이디어로 취급 받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란은 여러 측면에서 제기되고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기본소득 재원 마련은 어떻게?
기본소득이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동의하고 이해를 했다고 해도,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기본소득을 지급하기 위해 들어가는 막대한 재원은 어떻게 마련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일 것입니다. 북유럽을 중심으로 복지제도가 잘 되어 있는 나라에서조차 복지에 소요되는 재원 마련이 어려워져 복지제도가 축소되기도 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기본소득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재원 마련 방법은 오래된 토론 주제였습니다.
기본소득 재원 마련 방법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기존 예산을 재분배해서 자체적으로 마련하는 방법입니다. 여기에는 우선 오늘날 이미 시행되고 있는 사회복지제도 예산을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돌리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려 만들어진 복지 제도와 그에 따른 예산 집행이 여러 문제를 낳고 있음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복지제도에 들어가는 재원을 기본소득으로 돌릴 경우 일정한 부분을 충당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사회복지를 운영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추가로 절감하여 기본소득에 필요한 재원으로 충당해 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존 예산 중에서 중복되거나 낭비되는 예산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여 기본소득 재원으로 만들어나가는 방식은 지속성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효율적 예산 집행이 계속 이루어질 경우 추가로 생겨나는 재원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기본소득 재원 마련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언급되는 아이디어는 조세 체계를 개혁하는 방법입니다. 소득과 부의 재분배를 위해 각종 소득세와 자산세를 누진적으로 적용하여 세금을 부과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최상위 계층이 부의 상당 부분을 독점하는 시대에서는 이들이 보유한 부가 사회 전체에 분배되어야 한다는 논리와 맞물려 기본소득 재원의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이는 북유럽을 중심으로 복지제도가 강화된 사회에서는 이미 유사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방식입니다. 실제로 북유럽 국가의 시민들의 총조세부담률은 대체로 50%에 달합니다. 그럼에도 그 사회 시민들은 ‘사회적 부의 나눔’이라는 공동체의 지향에 높은 비율의 조세부담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시민이 내는 세금이 특정 세력이나 부패세력에게 부정하게 돌아가지 않고 모든 국민의 혜택으로 베풀어지는 시스템이 정착한다면 증세에 따른 저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줄어들 것입니다. 과세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지하경제의 돈을 적절히 환수하여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이러한 저항감을 줄이는 데 한 몫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소득세나 자산세 외의 기본소득에 필요한 세금을 추가로 걷는 것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방법으로 ‘토지세’와 ‘생태세’를 들 수 있습니다. 토지세 명목으로 세금을 걷는 것은, 토지는 엄연히 공유재산이라는 측면에서 설득력을 지닐 수 있습니다. 투기 목적을 갖고 있거나 과도하게 부동산이나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지금보다 훨씬 더 적절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기본소득의 논의가 아니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과세 정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같이 부동산 거품이 심한 나라에서는 더더욱 이러한 방식의 과세는 필요해 보입니다. 생태세는 탄소세와 같이 생태환경을 파괴하는 기업활동에 일정한 세금을 부과하여 재원을 마련하는 방식입니다. 기본소득의 재원을 충당함과 동시에 생태 환경을 보호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습니다.
재원 마련 방법으로 거론되는 것 중에서 가장 혁신적인 방법은 국가화폐에 기초한 국민배당 혹은 시민배당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제안한 사람은 1930년대 영국의 클리포드 더글러스였습니다. 그의 사회신용론에 따르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가장 큰 문제는 금융자본이라고 합니다. 그는 사적 이윤을 추구하는 금융자본이 부채에 기반한 화폐발행 및 신용창출 기능을 독점하면서 여러 문제를 야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글러스는 국가나 사회의 공적인 영역에서 부채에 기반하지 않는 화폐를 발행하고 이를 사회구성원들에게 배당 형식으로 나눠주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금융시스템이 만들어낸 체계에 매우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지는 제안이지만, 최근들어 실제로 일어났던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는 ‘사회신용론’에 관한 설득력을 더 높여주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재원 마련 방법은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기본소득의 재원 마련에 관해서는 찬반 양론이 존재하며 여전히 기본소득 논의 중에 가장 ‘뜨거운 감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다만 사회의 어떤 제도와 마찬가지로 기본소득 재원 마련도 결국 사회적 합의에 의해 만들어져 나갈 수밖에 없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2. 기본소득이 지급되면, 사람들이 일을 할까요?
기본소득에 관한 또 다른 차원의 중요한 논란은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사람들이 게을러진다거나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정작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라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스위스 기본소득 활동가 다니엘 헤니와 에노 슈미트가 독일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응답자의 60%는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으며, 30%는 일하는 시간을 조금 줄이고 다른 일을 하고 싶다고 응답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 같은지를 묻는 조사에서는 80%가 일을 그만둘 것이라고 답변했습니다.
부분적이고 작은 실험이기는 하지만 2009년에 런던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한 자선단체가 기본소득 취지에 맞게 조건 없는 돈을 지급한 적이 있습니다. 이 노숙인들은 1년 반이 지나자 13명 중 9명은 결국 거주지를 마련했고, 그들 전원이 자기계발에 힘쓰며 새로운 삶을 찾았다고 합니다. 평소에 이들을 위한 시설과 음식 제공으로 들어간 돈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빈민과 노숙 문제를 해결한 사례입니다. 2008~2009년에 아프리카 빈국 나미비아에서는 무조건적인 기본소득 형태로 실험 사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저임금 농업노동자가 다수인 오치베라-오미타라 마을 주민 930명에게 나미비아 최저생계비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100나미비아달러가 매달 지급되었는데, 해당 마을의 극빈자 비율이 80%에서 40%로 절반이 줄었으며, 실업률도 60%에서 45%로 감소했다고 합니다. 주민들의 소득도 기본소득을 제외하고 전보다 실험 후에 더 늘었습니다. 범죄율도 줄고, 아이들의 학교 출석률도 높아지는 등 긍정적인 변화가 뒤따랐습니다.
인도에서도 이와 비슷한 실험이 진행되었는데, 9개 마을 6000명 주민에게 2년간 지급된 기본소득 실험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빚이 줄고, 건강이 호전되었으며, 21%가 실험 전보다 소득이 늘었습니다. 기본소득을 담보로 토지를 구입해 이를 기반으로 하는 노동시간과 생산시간이 늘었다고 합니다. 애초의 예상과 달리 술의 소비가 오히려 줄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신체와 정신의 건강을 호전시켰고, 생활여건을 개선했으며, 사회적 연대를 강화했습니다. 더군다나 이 실험이 끝난 다음에도 이와 같은 긍정적인 변화는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 실험을 주도하고 분석한 인도의 기본소득 운동가 사라트 다발라는 기본소득을 통해 얻게 되는 가치가 “금전적인 것보다 해방적인 가치가 더 크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기본소득이 나태함을 불러오거나 노동의욕을 감소시키지 않는다는 사례는 1970년대에 북미에서 이루어진 실험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캐나다 더핀 마을과 미국 시애틀에서 일시적으로 실시된 현금지급 프로젝트 결과 미세한 노동시간 감소는 있었지만 교육시간이 늘거나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시간이 더 늘어서 전체적으로 보면 이전보다 더 의미있는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기본소득이 시행되면 부분적이고 일시적으로는 노동시간이 감소할 수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노동포기’나 ‘노동기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여러 실험과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결과입니다.
무엇보다도 기본소득의 시행으로 ‘강제된 노동’, 혹은 ‘강요된 노동’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오랫동안 종교처럼 신성시되어 온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의 신화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일을 하고 싶어도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 말은 일종의 강요된 폭력입니다. 일을 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사람들의 생존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이 같은 비정한 노동윤리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그 동안 또 다른 측면에서 맹목적으로 신봉되어 온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라”는 신화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당장 물고기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물고기를 주는 것이 맞습니다. 물고기로 생존한 후에 물고기 잡는 법을 익혀도 늦지 않습니다. 30여년 간 아프리카 빈곤과 개발 문제를 연구해 온 제임스 퍼거슨 스탠포드대학교 인류학 교수는 그의 저서, 『분배정치의 시대, (원제: Give a Man a Fish)』에서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겠다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그냥 물고기를 주라”고 말합니다.
끊임없이 비인간적인 노동을 강요하는 근대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담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버트란드 러셀은,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진정한 지식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생필품을 얻는 정도의 노동만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노동윤리는 특권층이나 지배계층의 논리라는 것이 러셀의 생각이었습니다. 기본소득 시행으로 사람들이 게을러질 것이라고 예단하는 것은 앞선 사례에서 보듯이 기우일 가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편협한 노동윤리로 우리의 삶과 미래를 옭아매는 논리라는 점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3. 왜, 부자에게도 지급되어야 하나요?
기본소득에 관한 의구심 중에서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왜 부자에게도 지급하는가?’에 관한 질문입니다. 지금까지 시행된 복지제도에서는 부유한 계층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에 비해 기본소득 제도는 부유한 사람들도 가난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기본소득을 지급받아야 함을 원칙으로 합니다. 이는 기본소득의 정신이 그 어떤 특정한 대상도 소외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데서 비롯됩니다. 기본소득은 원칙적으로 공동체의 모든 성원들에게 지급되어야 합니다. 이는 앞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한 것처럼 지급 대상에 대한 자격심사를 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른 것입니다. 따라서 기본소득의 지급 대상은 어떤 계층적 조건에 따라 선정되거나 배제되지 않습니다.
기본소득의 논리대로라면 한 사회가 보유한 사회적 부는 그 구성원들에게 고루 분배되어야 합니다. 구성원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소수의 부유한 구성원들도 마땅히 사회적 부를 분배 받을 권리를 동등하게 지닙니다. 기본소득은 구성원 개개인이 어떤 활동을 하는가에 관계없이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소득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소득에서 ‘조건 없음’이란 활동의 유무에 상관없이,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지급받는 것을 말합니다.
실상을 살펴보면 여기에는 역설적 상황이 존재합니다. 어떻게 보면 기본소득은 부유한 사람들에게 가장 불리한 제도입니다. 기본소득이 시행되기 위한 재원 마련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부유한 계층은 지금보다 상당한 정도의 조세 부담을 떠안아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부유한 사람들의 계층적 존재 자체를 위협할 정도의 부담은 아니라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입니다. 또한 그들이 쌓은 부의 형성과정에서 사회나 공동체로부터 받은 사회적 자산이나 공공재의 혜택에 대한 정의로운 분배라는 관점에서 보면 마땅한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수의 부자들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그들의 소득수준으로 볼 때 매우 미미한 정도의 액수일 것입니다. 하지만 부자들에게도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은 부유한 사람들의 부의 안정성을 지키는 데에도 궁극적으로는 이로운 일입니다.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동등하게 일정한 금액을 지급받는다면 공동의 기여와 공동의 분배라는 의미는 더욱 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기본소득을 둘러싼 비판과 논란, 쟁점은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기본소득이 너무나 거대하고 이상적인 기획이어서 실현가능성이 부족하다, 기본소득 시행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 기본소득보다는 지금 시행되고 있는 복지제도 시스템을 강화하자, 기본소득이 노동계급을 약화시킨다, 기본소득은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것인지, 기본소득을 위한 증세에 대한 저항은 없는지와 같은 여러 의견과 반론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의견과 반론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논의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본소득의 역사가 짧지는 않지만 최근처럼 본격적으로 논의된 적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본소득 논의는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출발선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3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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