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스포트라이트’는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과 교회의 조직적 은폐를 끈질기게 파헤친 ‘보스턴클로브’의 탐사보도를 다룬다. 인구의 절반이 신도일 정도로 카톨릭의 영향력이 막강한 지역에서 추기경과 지도층 인사들은 침묵을 강요한다. 하지만 편집국장이었던 마틴 배런은 신문의 독립성을 강조하며, 신부 일부의 일탈을 넘어 카톨릭 교회의 조직적인 문제로 파고든다.

2013년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그의 명성은 계속 이어진다. 2021년 퇴임 때까지 8년 동안 워싱턴포스트에 10개의 퓰러처상을 안겨주었다. 신문의 디지털 혁신도 이끌어 뉴욕타임스와 함께 성공 사례로 꼽힌다. 온라인 신문 구독자가 3백만명으로 3년만에 3배 넘게 늘었다. 부임 초 580명이었던 기자 수는 1000여명으로 증가했다.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가 신문을 인수했지만 자본에 예속되지 않았다.

국내 한 신문이 창간 기념일을 맞아 배런 국장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책임 있는 언론으로서 역할을 더욱 충실히 다지겠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언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심각한 상황이다. 옥스포드대 부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40개국을 대상으로 해마다 발표하는 신뢰도 조사에서 한국은 도맡아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

미디어 환경이 디지털로 바뀌면서 전통 매체가 겪는 어려움은 세계적 공통현상이다. 정의와 공정, 진실의 잣대와 기준이 흔들리고 있고, 소셜 미디어와 유투브에 치이고 밀리는 상황이다. 배런 국장은 인터뷰에서 “많은 사람이 사실과 허구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들은 정보를 제공받기보다 (신념을) 확인 받기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사실들이 공유되지 않는 한 민주주의는 성공하지 못한다.”며 언론의 역할을 강조한다.

한강 대학생 사망 사건은 최근 한 달 이상 우리 사회를 강타했다. 안타까움에서 시작된 사건의 전개는 눈덩이처럼 커져 애도 분위기를 넘어섰고, 합리적인 의혹 제기와 명확한 진상 조사를 요구하는 차원을 넘어섰다. 가짜뉴스와 음모론과 무수한 거짓 증거들이 나돌고, 경찰의 기초적인 조사 내용도 불신 대상이 되었다. 의혹만으로 타살의 신념에 빠져들었고, 일부 유투버들이 앞다퉈 부추겼다. 하지만 이들만의 문제일까?

PD저널은 사건 초기 열흘간 각 언론사가 네이버에 관련 뉴스를 송고한 기사가 무려 2천건이 넘는다고 전했다 국정농단 사태 당시의 보도량에 맞먹는 기사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언론사별 많이 본 뉴스에서도 줄곧 상위권을 차지하면서 다른 이슈를 다 덮어버렸다. 온라인에 떠도는 ‘아니면 말고’ 식의 일방적인 의혹과 주장을 실어 날랐고, 비슷한 기사를 끊임없이 생산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주류 언론도 예외가 아니었다. 포털에 매달리고 의존하는 게 경쟁력이 된 언론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배런의 말로 이번 사건을 연관 지어 설명하면 사실과 허구를 구별하지 못하고 자신의 뜻에 부합하는 내용만 취사선택하려는 미디어 수용자들에게 언론은 깊이 있는 취재를 통해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고 알리는 역할에 충실 했어야 한다. 하지만 건수 위주의 기사 생산 경쟁을 벌였다. 본질은 외면한 채 중계방송 식의 나열 보도가 끊이지 않았다.

파장이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나서야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일부 언론을 중심으로 심층 취재가 시작되었다. 언론은 거대담론만을 다루는 게 아니다. 작게 보이는 사안에서도 그 안에 숨겨진 실체적 진실을 밝혀야 한다. 여론에 편승하지 않고 사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배런 국장이 은퇴할 때 경쟁지인 뉴욕타임스는 그의 인터뷰를 실어 기록으로 남겼다. 이때 배런은 현재 언론이 직면한 최대의 도전으로 ‘대중 사회에 자리잡은 음모론적 사고’를 꼽았다. 미국은 선거 결과를 부정하는 극우 음모론자들에게 의사당이 점거 당하기까지 했다. 편향된 시각에 의한 그릇된 신념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확증편향의 시대에 언론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고,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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