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이 시즌8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누구나 주인공이라 믿었을 에다드 스타크가 시즌1 말미에 처형당하면서 ‘주인공도 죽이는 (따라서 어떤 캐릭터가 죽어나갈지 모르는) 드라마’로 화제를 모았다. 적지 않은 캐릭터 중에서도 명문세도가에서 난장이로 태어난 티리온이 초반부터 나의 눈길을 끌었다. 신체적 핸디캡을 냉소와 재치, 쾌락으로 흘려버리는 매력적인 캐릭터지만, 피와 살점이 튀는 전투와 음모술수 속에서 언제까지 살아남을지 내심 걱정스러웠다.

그러던 중, 이 드라마가 몇 시즌까지 가든 티리온은 끝까지 살아남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대목이 있다. 시즌1에서 누명을 쓴 채 감옥에서 끌려나온 티리온이 자백이랍시고 일곱살부터 저질렀던 장난질을 연대기적으로 늘어놓는 장면에서였다. 청중의 웅성거림은 곧 키득거리는 웃음으로 바뀌고, 티리온의 ‘자백’을 흥미롭게 듣던 용병 브론이 티리온을 위해 결투재판에 자원한다. 스토리의 힘은 그토록 막강하다. 웃음과 공감을 자아내는 스토리는 누군가에게 목숨을 걸고 나서게 할 만큼 사람의 마음을 살 수도 있다.

이 대목에서, 티리온은 <왕좌의 게임>을 만든 스토리텔러들의 자의식이 투영된 캐릭터이자 그들의 대변인이구나 싶었다. 이후, 티리온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더라도 마음 졸이지 않고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스토리의 의미와 가치를 아는 티리온의 면모는 결말에서 킹메이커의 역할로 부활한다.

<왕좌의 게임>(시즌 1 제6화) 중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티리온

스토리는 ‘텔링’을 통해 전달된다. 스토리가 ‘무엇’이라는 내용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텔링은 ‘어떻게’라는 전달방식을 가리킨다. 즉, ‘스토리텔링’은 스토리 뿐 아니라 스토리가 전달되는 매체의 형식적 특성까지 포괄한다. VR 스토리텔링을 논의하며 가상현실매체의 기술적, 예술적 가능성까지 함께 다루려 했던 이유다.

애니메이션과 영화의 탄생으로 이미지에 움직임이 도입된 이후 영상매체는 지각적 몰입감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진화해왔다. 무성영화시대를 거쳐 사운드가 도입되고, 흑백 영화에서 컬러 영화로 넘어왔다. CG 기술의 발전으로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마저 척척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급기야 CG와 실사의 구분조차 어려운 단계까지 왔다. 마침내 VR 기술의 출현으로 이용자가 물리적으로 속한 환경보다 입출력장치를 통해 매개된 환경 속에서 더욱 실재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가상세계가 현실을 대체하게 된 것이다.

인간 모두 자신이 주인공인 스토리를 살아가는 존재다. 스토리텔링은 스토리를 편집하고 구조화하여 논리와 의미를 구성하는 행위다. 그런데, VR 기술의 발달과 함께 이용자를 매개된 세계 안으로 밀어넣어 가상적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VR 매체에서 스토리는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 된다. 이제 이용자는 자신이 가상 세계에서 체험한 스토리를 자율적으로 구성하여 스스로 스토리텔링을 해야 하는 지점에 다다랐다.

물론, 이 ‘자율성’은 VR 체험이 디자인된 방식에 상당 부분 구속되고 통제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실이라고 우리 인생이 어디 완전히 자율적으로 살아지던가? 우리는 특정 시점에, 어떤 나라에서,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부모 밑에 태어나 살아간다.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가장 큰 변수들은 우리 스스로 결정하지 않았다.

‘가상현실’이라는 형용모순을 살아가며 나름의 고유한 스토리를 구성하기, 이것이 VR 매체가 제시하는 혁신적 지점이자 근본적인 변별점이다. 결국, VR 스토리텔링은 없다. VR 스토리텔러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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