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나 다큐멘터리, 또는 주요 유적지 등에서 과거의 사건이 재연(reenactment)되는 경우를 흔히 본다. 재연은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재구성되어 시청자나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 정서적 효과를 증폭시킨다. 그러나 자료가 부족하거나 불분명할 경우 핵심적 사실이 누락되거나 과장될 위험성이 존재한다. 게다가 매체를 통해 재연된 이미지를 접하는 경우 재연과 실제 상황이 혼동을 일으킬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로스엔젤레스의 기아(Hunger in Los Angeles)>(2012)는 2010년 8월의 무더운 여름날, 로스엔젤레스의 한 푸드뱅크 앞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가상현실로 재연한 것이다. 이용자가 HMD를 끼면, 푸드뱅크에서 음식을 무료배급받으려는 사림들이 긴 줄을 이룬 현장에 서게 된다. 현장 관리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를 연거푸 외치며 당혹스러워한다. 갑자기 한 남자가 쓰러진다. 이 남자는 당뇨병을 앓고 있는데, 제때 음식을 섭취하지 못해 저혈당 쇼크에 빠진 것이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가운데 누군가 구급차를 부른다. 그 와중에 소란을 틈타 새치기를 시도하려는 사람이 있다. 현장 관리자는 그 사람에게 줄 끝으로 가라고 소리를 지른다.

<로스엔젤레스의 기아>의 한 장면(왼쪽)과 쓰러진 남자를 향해 손을 뻗은 이용자

이 작품을 기획하고 만든 노니 델라 페냐는(Nonny de la Peña) 본디 출판, 다큐멘터리, 방송 과 같이 전통적 저널리즘의 영역에서 활동해온 언론인이다. 델라 페냐는 테드 강연에서 가상현실과 저널리즘을 결합한 ‘몰입형 저널리즘(immersive journalism)’을 소개하며 이 작품에 대해 상세히 언급한 바 있다. 델라 페냐는 2010년 경 가상현실을 통해 이용자를 뉴스가 전하는 실제 상황 ‘안으로’ 밀어넣을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가상현실과 뉴스의 접점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고민은 주변 동료의 공감을 얻지 못했고, 재정적 지원 역시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당시 푸드뱅크를 취재하던 델라 페냐는 자신이 다른 사람을 배고프게 만들 수는 없을지언정 다른 이의 신체적 감각을 자극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상현실에서 본다. 델라 페냐는 주위의 도움을 받고 장비를 빌리며 600달러도 안 되는 초저예산으로 이 작품을 완성한다.

최근 디지털 콘텐츠의 정교한 CG를 감안할 때, 이 작품의 CG 이미지와 움직임은 거칠고 어색하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2012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공개되었을 때, 많은 이용자들이 쓰러진 남자 곁에 쪼그리고 앉아 도우려 하거나 말을 건네거나 눈물을 흘리는 등 안타까운 상황에 대해 깊이 감정이입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반응은 VR 다큐멘터리 제작자인 크리스 밀크(Chris Milk)가 VR을 ‘궁극적 공감장치(the ultimate empathy machine)’로 명명한 것과 상통한다. 델라 페냐와 밀크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가상현실은 이용자를 가상공간으로 원격현전시켜 주위의 상황과 인물에 대한 공감을 끌어내는 데에 탁월한 매체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델라 페냐의 작품이 실제 상황의 소리에 기반한 인공적인 이미지를 통해 재연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작품의 사운드는 델라 페냐와 함께 푸드뱅크를 취재해온 인턴이 사건 당시의 실제 상황을 녹음한 것이다. 델라 페냐는 제한된 예산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을 가능한 한 충실하게 복제하려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시각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이미지와 움직임은 이용자에게 공간과 캐릭터의 인공성을 환기시킨다.

TV 재연 프로그램에서 유명하지 않은 재연 배우가 일반인같은 외모로, 일반인같이 연기하는 것은 재연을 실제로부터 구분하는 코드로 작용한다는 연구가 있다. 유명 배우는 섬세한 연기로 관객을 환영의 세계에 몰입하게 한다. 반면, 재연 배우의 덜 다듬어진 연기는 그 상황이 실제가 아니라 재연된 것임을 노출시킨다. 델라 페냐의 작품은 현실에서 채취된 사운드와 어설프게 재연된 이미지의 길항관계를 통해 이용자에게 푸드 뱅크의 참혹한 현실에 대해 질문하게 만든다. 21세기에, 초강대국인 미국에서, 제대로 먹지 못해 길바닥에 쓰러지는 사람이 있다는 초현실주의적 현실은 실제 상황과 재연의 간극을 거쳐 부활한다. 이런 맥락에서, 델라 페냐에게 예산이 충분치 않았다는 사실은 오히려 이 작품에게 축복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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