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Pearl)’은 진주라는 의미를 지닌 명사로 서양에서 여성의 이름으로도 흔히 쓰인다. 그런데, VR 애니메이션 <펄>에는 ‘펄’이라는 인물도, 진주도 나오지 않는다. 이 작품은 해치백 자동차를 타고 떠도는 음악인 부녀의 이야기이다. 아버지가 시작하고 딸이 이어받아 부르는 노래, <모든 길은 집으로 향한다(No Wrong Way Home)>의 뮤직비디오 형식을 띤다. 그리고 딸의 이름은 ‘사라’이다.

<펄>은 성인으로 자란 사라가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해치백을 찾아와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액자구성을 취한다. HMD를 착용한 이용자는 자신이 어느 낡은 해치백의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용자는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나이 들어가는 등장인물들의 모습과 수시로 바뀌는 차창 밖 풍경을 지켜보게 된다. 차 안에 고정된 이용자의 자리는 적지 않은 시공간의 단절을 뛰어넘어 작품 전체의 통일성을 담보하는 연결고리로 기능한다.

가상현실의 핵심적 속성으로 꼽히는 원격현전(telepresence)은 직접 감각되는 물리적 환경보다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통해 매개된 환경에서 더욱 실재감을 느끼는 현상이다. 이를테면, 거실에서 HMD를 착용하고 <펄>을 체험하는 이용자가 자신의 몸이 속해 있는 거실보다 가상현실의 해치백 안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갖는 것이다. 원격현전은 이용자의 시선이 자유롭다는 VR의 특성과 결합하여 공간성을 강화한다.

음악인으로 성공한 사라는 잊혔던 해치백을 다시 만나, 자신이 아버지와 공유해온 것이 음악만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사라는 해치백을 ‘부활’시켜, 아버지를 태우고 음악 행사장에 나간다. 이즈음에서, 차나 배 등의 교통수단에 여성형 이름을 붙이는 서양 관습에 익숙한 이용자라면, ‘펄’이 해치백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작품의 숨겨진 주인공은, 한때 부녀의 ‘집(home)’이자 유랑의 이동수단이었으며 긴 시간 동안 음악인 부녀의 곁을 지켜온 해치백, 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시점을 3인칭이 아니라 1인칭으로 해석할 여지가 생긴다. 즉, 이용자는 해치백에 ‘빙의’하여, 1인칭 주인공인 펄의 시점으로 부녀의 세월을 지켜봤던 셈이다. 이용자의 마음은 곧 ‘펄의 마음’이 된다.

펜로즈스튜디오(Penrose Studios)의 프로덕션디자이너인 섀넌 제프리즈(Shannon Jeffries)는 VR 애니메이션에서 공간 설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VR 콘텐츠의 특성상 공간적 배경을 특정 카메라 각도로 제한할 수 없으므로, 공간이 다양한 각도로 제시될 수 있도록 온전히 디자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제프리즈는 자신에게 공간적 배경이 하나의 ‘캐릭터’로 느껴진다고까지 말한다. <펄>에서 해치백은 시선의 대상이 아니라 이용자가 원격현전하여 머물 수 있는 공간화된 캐릭터이다. 프레임이 가상세계로 뚫린 ‘창’으로 기능하는 스크린 기반 매체에서는 구현 불가능한 캐릭터이다. 이러한 점에서 <펄>은 VR에 특화된 스토리텔링의 가능성을 보여준 영리한 작품이다.

인쇄하기
이전
다음
1+

소요 사이트를 방문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액수에 관계없이 여러분의 관심과 후원이 소요 사이트를 유지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후원금은 협동조합 소요 국민은행 037601-04-047794 계좌(아래 페이팔을 통한 신용카드결제로도 가능)로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